안부를 묻다 어두운 까페에서 컨트리음악이 흘러나오는 순간 사랑하던 여인을 닮은 바람이 불어온다 고개를 들어 활짝 열린 창 너머 흔들리는 진초록 잎새들을 본다 다시 그 너머 무엇도 쓰여 있지 않은 하늘연푸른 종이 위에 무어라도 쓰고 싶어 펜을 꺼낸다 너의 이름, 아직 오지 않은 계절, 강릉 앞바다 지도에 없는 마을, 아틀란티스, 막스 데미안과 사라진 별들 이런 것들 썼다가 지운다 더 멀리서 한 점의 구름 떠온다 잎새들은 흔들리며 말한다 구름이 감춘 오지 않는 순간들에 대해 까페로 들어선 바람에게 좌석이 없다 음악은 어느덧 재즈로 바뀐다 서성이는 바람에게 안부를 묻는다 건강하시죠 저는 건강합니다 2013. 6. 1. 멀고느린구름
끝나지 않을 인사 사랑이라 부른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5월의 저녁을 적시던 소나기와불러보면 노래와 같던 너의 이름외로움 앞에 의연하던 북한산 정상의 바위와어느 오후 졸음으로 지나쳤던 차창밖의 풍경들달리던 자전거를 멈춰세우던 아기 고양이와연인이 생기면 들려주자던 봄의 노래들떨어지던 붉은 페이지들잊히지 않는 만월의 바다눈꽃 사이를 헤매다니던 긴 옷자락들우리가 처음으로 맞잡았던 손의 온기와헤어진 뒤면 찾아오던 백야의 날들을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되돌아 오는 것은 마음그래서 안녕과 안녕은 같은 말일까너를 떠올릴 때마다 쉬이 내뱉던 작별의 인사이제는 안녕하지만 사랑이라 부를 것들 이리 많아서야쓴 커피와 즐거운 사람들 유려한 음악그 사이사이에 앉은 수많은 너어쩌면 끝내 끝나지 않을 인사아무튼 안녕. 2012. 11..
아를의 강가에서 아를의 강가에서 차를 멈추고선루프를 열어 별들을 내려오게 했다설혹 짧은 생 속에도 눈물은 고인다고새벽의 취기를 빌려 이야기했다너와 내가 고른 맥주의 이름은 달랐지만비우거나 지우거나강물에 띄우고픈 말들은 닮아 있었다저편의 불빛이 아를을 떠나는 배라고 나는 말했다누구나 자기의 삶을 떠나버리고 싶은 때가 있었다가슴에 켜켜이 쌓인 지나온 밤의 무게에 숨이 막혀태양계 너머에 놓인별들의 강을 무심코 올려다보았다하루가 시작되지 않기를 바라는오래전의 나와 지금의 네가거기에서 만나 부끄러이 손을 잡고 침묵의 춤을 춘다하늘과 강, 혹은 시작과 끝의 어슴에서우리는 다시 너와 나의 하늘이 밝아오는 것을 담담히 바라보며 각자의 삶을 주워들었다우물처럼 멀어지던 아를의 강가에서. 2012. 6. 28. 멀고느린구름.
저녁의 유람선 저녁의 유람선을 타고 우리는 얼어붙은 강을 녹이고 있었다 물결에 떠밀려 선창으로 스미는 인공의 별들을 뒤로하고 네 눈동자에 숨긴 별을 찾고 싶었다 관광을 나온 이국인들은 이국의 정취에 취해 말을 멈추지 못했다 나는 오로지 너의 멈추지 않는 말을 오래도록 듣고 싶었다 마냥 너의 말에 취하고 싶은 저녁이었다 늦은 겨울은 세찼다 손의 온기가 식지 않도록 애썼다 너의 손에 그 온기를 넘겨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유람선이 종착지에 가까워 가고 있었다 어디에서도 내리고 싶지 않았다 영원한 겨울과, 영원한 저녁, 영원한 유람선이 세상 어딘가에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사랑은 어디쯤에서 반드시 그친다는 말을 사랑할 수 없었다 저녁의 유람선은 순환코스를 돌아 다시 잠실 선착장에 닿았다 우리는 배에서 내렸다 그때..
사랑법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또는 하늘에 대하여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흐르지 않는 강물과누워있는 누워있는 구름,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흐르지 말고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떠나고 싶은 자홀로 떠나는 모습을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그대 등 뒤에 있다. ------------------------------ 그대가 이 시를 나에게 소개해주던 밤은 참 행복했다. 내 마음 속에도 차갑고 깊은 밤 하늘 위에도 따스한 한 줄기 강이 흘렀다.시를 읽고 나서도 도시 '사랑법'은 모르겠다 싶으면서도 그 한 줄기 강은 참 사랑스러..
사랑이 떠나던 날 붉은 산 너머로 지던 태양붉어지던 잎사귀들적도 위의 섬들뜨겁던 여름의 정오들을 떠올립니다당신을 그리워하면빨갛게 익어가던 내 속의 열매들이여전히 빈 가지 끝에서익어가는 듯한데사람의 속에도 어김없이 겨울은 들어눈이 내리고, 시나브로 쌓이고,눈 녹을 때 즈음엔 당신도 거기에 없기를 바랍니다나는 너무 많은 세월을 당신의 곁에서 맴돌았습니다그러나 뿌리들이 땅에 닿고 바다에 닿고당신에 닿기까지에는보다 잦은 번민과 깊은 울음이 필요했던 모양입니다나무의 본체는 뿌리일까요 가지일까요 열매나 잎일까요마찬가지로 사랑의 본체는 무엇일까요나는 내가 맺은 것들을 지나치게 소중히 여겼습니다벚꽃이 만개한 길을 피해눈이 내리는, 혹은 겨울비가 쏟아지는 카페에 앉아커피로 정신을 깨우는 날입니다사랑이 떠나던 날, 이별의..
동해기행 가버린 것은 세월만이 아니었다 내가 여행을 떠났을 때 그제서야 비로소 영영 오지 않을 것들이 집의 주인이 되었다 여행지의 밤 하늘엔 별 대신 무수한 이야기들이 총총히 켜져 잠을 쫓았다 나를 채우고 있던 바다가 한꺼번에 세상으로 밀려나가는 꿈을 꾸었다 어느덧 수평선 위였다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성성히 흩날리는 눈발을 보고 싶었다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는 박제된 추억을 손아귀에 힘껏 그러쥐고 싶었다 눈은 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뜻하지 않은 일기를 쓰는 날만이 이어졌다 누군가는 상처를 그 위에 기록했다 죄 많은 나는 상처를 쓰다가 지우곤 했다 사랑한 기억들이 유행한 노래처럼 또렷했다 너를 바라볼 때 나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을까 낡은 모텔의 거울 앞에서 엔돌핀을 만든..
그리운 친구에게 오늘 내 집 주소를 모른다던 너에게서 편지가 왔다 내 마음의 주소로 편지가 왔다 지금도 여긴 앞의 길은 멀고 등이 푸른 젊음은 슬렁슬렁 가고 있고 너는 그 멀고 그리운 길가에 서서 전화를 걸려다 동전을 갈마쥐어보며 앞 뒤 모두 푸른 등이라고 피식 울지도 몰라 예전에 달넘이 무렵이면 아무 일도 없는 스무 살 하루하루에 지쳐 진전 없는 서로의 풋사랑 얘기에 취해 노래를 부르고 까닭 없이 기쁜 걸음으로 돌아오던 기숙사 그 벤치에 늘어진 젊음처럼 누워 무성히 자란 나무의 까아만 이파리들과 우리네 시간보다 빛나던 별들을 올려다보았지 그러면 잊고 있던 꿈들이 가슴 속에 반딧불이 마냥 아롱아롱 켜졌더랬는데 새 학기가 다 가도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것만 같던 푸른 봄 집 떠나와 주소도 잃고 돌아갈 곳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