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모르는 사이 우리에게 침투한 악어 바이러스 이런 상상을 해보자. 약 2억년 전 중생대에 서식했던 악어의 조상 '테레스트리수쿠스Terrestrisuchus'(이름이 복잡하니 '테레'라고 하자)가 멸종하지 않은 채 인류와 금단의 이종교배를 이루어 인류의 한 부류로 성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 '테레'들은 인간 남성들을 다 잡아먹어버리고 남자 사람의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이 괘씸한 테레놈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0. 대부분 수컷이다.1. 고등생물체로서의 성욕 조절 능력이 없다. 2. 인간 여성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잡아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인간 여성들을 다른 테레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 내가 잡아먹기 위해서다. 4. 인간 여성들이 테레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것은 인간 여성들의..
GOP근무를 마치고 중위로 진급한 무렵부터 새벽 5시-6시경에 깨어 소설을 썼다. 도저히 글을 쓸 시간이 없어서 시간을 쪼개 쓰기 시작한 게 이제는 습관이 되어 벌써 7년이 넘었다. 그런데 그중 5년 동안 쓴 소설은 조금 허무한 처지가 되어버렸다. 재작년에서야 알았는데 인터넷에 개인적으로 발표한 글이라도 일단 발표가 된 글은 공모전 등에서 심사조차 받지 못하고 탈락이라는 것이다. 약 스무 편이 넘는 소설이 그냥 소모되고 말았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인터넷에 올렸다가 좋은 반응을 얻은 소설을 몇 번 공모전에 내봤다가 번번이 떨어지고 왜 그럴까 생각했었다. 허망한 일이다. 하지만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내가 한 일인 것을. 오늘도 공모전에 내보려고 글을 정리하고 있다. 요즘은 두 편을 내야 한다. 하나는 ..
우리가 꿈에 대해 물을 것은 를 읽은 것이 벌써 2008년의 일이다. 나는 그 책을 두 번 읽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읽고 싶어서 다시 읽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을 좋아하는 나는 를 읽고 소설가 정한아에게서 요시모토 바나나스러움을 발견하고 기뻤다. 바나나스러움이란 후면에 쓰인 김윤식 평론가의 추천사처럼 '청량감'이기도 하고, 내가 사용하는 '긴 손가락을 가진 피아니스트' 같은 느낌이기도 하다. (긴 손가락을 지닌 피아니스트는 어려운 음악도 쉽게 연주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데뷔 장편 에는 분명 그런 청량감과 단순함이 미덕으로 살아 있었다. 에도 그 미덕이 여전히 감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전작만큼 살아 있다는 느낌은 없다. 적어도 나는 느끼지 못했..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이 산다는 일 어떤 말로 글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부끄럽지 않을까. 오직 그것만을 생각했다. 내가 글을 쓰는 뷰러 형태의 책상 선반에는 윤동주 시인의 가 언제나 놓여 있었다. 파란색 바탕에 흰 글씨로 제목이 쓰인 정음사 1968년 초판본이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는 나는 종종 글을 시작하기 전, 또는 마치고 나서 손을 뻗어 시인의 시집을 아무렇게나 펼쳐 본다. 그러면 매번 다른 시가 내 앞에 펼쳐진다. 오늘의 시는 '창窓'이다. 쉬는 時間마다나는 窓녘으로 갑니다. 시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나 역시 학생시절 쉬는 시간마다 창녘으로 가던 소년이었다. 중학생 시절부터 나는 윤동주를 몹시도 사랑하였다. '별 헤는 밤'은 어머니와 함께 살지 못했던 나의 애송시였다. 별 ..
루시드폴의 아침과 해변의 청소부 루시드폴의 뜻은 '빛나는 가을'이다. 하지만 지금 창 밖에는 꽃이 피는 것을 시샘하는 추위가 서성이고 있다. 곧 봄이 온다는 뜻이다. 언젠가부터 차분히 나를 돌아보며 수필을 써나가는 일이 줄어들었다. 아마도 트위터를 시작한 무렵부터 였던 것 같다. 별 의미 없는 말이라도 마음껏 부려 놓을 수 있으니, 말들을 모아 의미를 만드는 작업이 점점 귀찮아지고 허망해진 모양이다. 2010년부터 2016년에 이르기까지 벌써 6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트위터에 글을 쓰는 것은 이런 느낌이다. 한 여름 해변에 앉아 있다. 각양 각색의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이 모래톱을 서성인다. 어떤 사람은 많이 가렸고, 누구는 조금 드러냈고, 적극적인 사람들은 얼굴에만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쓰고 모든 허물을 ..
함께 설원의 지평선을 바라보는 일에 대하여 오래전 나는 혼자 대관령의 설원 속을 거닌 적이 있다. 아무도 사랑하고 있지 않을 무렵이었다. 적어도 내게 사랑은 연애심리학 책에서 말하는 것들과는 달랐다. 인내하고 배려하는 선의 속에서 싹트는 것도 아니며, 비슷한 관심사를 가지고 재밌는 말을 주고 받는다고 해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 어느 순간부터 내 마음에는 시나브로 눈이 쌓여가고 있었다. 모든 것을 차갑고 하얗게 덮는 눈. 눈 덮인 마음을 품고 설원 앞에 섰을 때, 나는 가슴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왜 그랬을까. 그때의 나는 잘 몰랐다. 아무 것도 모르겠어서 그저 설원 속에 자박자박 발자국만 새기며 백지 속을 휘 돌아보고 나왔다. 내 마음의 눈 위에도 ..
허식 虛飾. 실속은 없이 겉만 꾸민다는 말이다. 나는 현대인의 허식이 너무 싫고, 어떤 때는 경멸스러운 감정마저 들 때가 있다. 너무 순진한 건지 나는 사람들이 허식으로 한 말을 거의 다 그대로 믿어버리곤 한다. 그말과 약속이 나중에 허식이었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마음에 작은 상흔이 생긴 이후이다.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너무 보고 싶다. 우리 언제 보자." 라고 밝은 얼굴을 가장하여 말하곤 한다. 그러면 나는 언제? 라고 묻곤 하는데 그럴 때 보통 상대방은 당황한다. 내 입장에서는 상대방이 먼저 보자고 했으니 언제 볼지를 정해야겠다고 여겨 묻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은 대부분 허식으로 한 말일 따름인 것이다. 나의 뜻하지 않은 질문에 상대방은 능청스레 "조만간 연락할게~^^"라고 말하며 얼굴에 이모티..
문득, 길을 잃었다 정말 '문득'이어서 어디서부터 내가 길을 잃은 채 걷고 있었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신해철이 갑자기 죽은 시점부터라거나, 세월호가 침몰한 순간부터라거나, 그도 아니면 박근헤 대통령 당선 발표가 나던 때부터라고 하는 것은 여전히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내가 언제 어디에서 길을 잃기 시작한 것인지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더 도드라지게 할 뿐이다. 길을 잃었다고 해서 대단한 일이 생긴 것은 아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살아가고 있고, 돈을 벌고, 갖고 싶은 물건들을 사모으고, 사람을 만나고 있다. 단지 그것 뿐이다. 문제는 거기에 있다. 내 인생은 어느 순간부터 단지 그것 뿐인 인생이 되었다. 나는 노를 잃었고, 내가 탄 뗏목은 강물 위를 단지 흘러가고 있다. 고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