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마을에서 바닷마을에서 산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듣는 소리는 항구의 뱃고동 소리였습니다.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갈 때면 바다 냄새가 나는 바람이 불어 왔습니다. 교실의 창문을 열면 멀리 바다가 보였습니다. 바다 저 편에는 수평선이 있어 늘 '세상의 끝', 혹은 '저 너머 어딘가'라는 말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하나는 절망적이고, 하나는 희망적인 말입니다. 바다에는 끝도 있고 시작도 있었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면 항상 모래톱 위에 발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그저 아무 것도 없는, 아니 단지 모래밖에 없는 백사장이었습니다. 그점이 저에게 깊은 위안을 주었습니다. 파도처럼 거칠게 휘몰아치는 상념을 공백하게 만들어준 것입니다. 해변의 이쪽에서 저쪽까지 걸으며 늘 사람의 ..
우리가 세상을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을 때 커피는 어느새 내 삶에 없어서는 안 될 것 중 하나가 되었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까지 커피를 금기의 음식으로 여겼다. 어릴 적부터 커피란 건 어른의 자격을 얻어야만 먹을 수 있는 음료로 배웠던 것이다. 학생의 신분으로 커피를 먹는 이들을 보면, 학생의 신분으로 음주를 하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되게 정직한 체제의 모범생이었던 내가 처음 커피 맛을 본 때는 2001년 봄이다. 나는 아직도 그 날의 일을 생생히 기억한다. 기숙사에서 나와 혼자 자취방을 얻어 살고 싶었던 나는 돈을 벌어야 했다. 친구의 동아리방 옆 지하에 있었던 커피하우스 보헤미안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일터였다. 나는 30분 넘게 보헤미안의 입구에 서서 노란 간판을 보며 망설였다. 간신히 낡은 문..
2015년 대한민국, 누구에게도 보여지지 못하는 시위 시위(demonstration)는 기본적으로 '보여주는 운동'이다.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정치적 메시지'이고, 누구에게 보여주는가 하면 '대중에게'다. 군중들이 모여 한 자리에서 와- 하고 끝내는 건 집회-모임인 것이다. 따라서 시위 허가가 났다면 응당 거리의 불특정 다수가 시위대의 정치적 메시지를 '볼 수 있도록' 가두 행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참여정부 말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경찰 차벽은 근원적으로 이 '보여주기'라는 시위의 근본 취지를 봉쇄하고 있다. 이는 반민주적 행위이고, 헌법재판소에서도 위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법원의 유권해석도 공공의 안전을 위해 필요할 시 차벽을 세우되 시위대 및 시민의 통행로를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
사랑하라, 더욱 사랑하라 1950년, 바람 부는 흥남 부두를 떠올린다. 영하 20도 아래의 한 겨울이다. 육 킬로미터 밖, 열심히 행군을 해온다면 반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으로부터 중공군과 북한군이 밀려 오고 있다. 수 만 명의 사람이 흥남 부두에 모여 어떤 배라도, 배의 형상만 갖추고 있으면 올라타려고 시도한다. 그것이 폭발하면 주위의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연료를 실은 연료 수송선이라고 해도 상관 없다. 훗날 마리너스 수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30대의 미국인 레너드 P 라루 선장은 전쟁터에 연료 수송을 하라는 첫 임무를 부여 받고 흥남 부두에 도착했다. 교전 상황이 격화된 탓에 선장은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퇴각 명령이 떨어졌다. 선장이 배를 돌려 떠나려고 할 때 부두에 모인..
사랑은 상대를 존경하고 시간을 견디는 것 두 사람은 교정의 비탈길을 걸어 오르며 사랑에 대해 서로에게 물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그녀 쪽이었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그남은 쉽게 답하지 못하고 생각에 빠졌다. 너는? 시간을 벌기 위한 물음이었다. 음... 글쎄. 네 얘기부터 듣고 싶은데. 그래? 뭐랄까... 그래, 그런 것 같아. 시간을 견디는 것?시간을 견디는 것?응. 사랑이라는 건 그때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는 것 같아. 얼마나 오랜 세월을 견디어 내는 마음인가. 진짜 사랑이라면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쉽게 바래지지 않는 그런 거 아닐까. 음... 시간을 견디는 거라... 그녀는 자신의 몸을 향해 단단히 팔짱을 낀 채 비탈 위에서 불어닥치는 바람을 막았다. 그남은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2015) RIGHT NOW, WRONG THEN 7.5감독홍상수출연정재영, 김민희, 윤여정, 기주봉, 최화정정보드라마 | 한국 | 121 분 | 2015-09-24 글쓴이 평점 정말 지금이 꼭 맞지 않더라도 우리는 종종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렸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사람은 과거를 반추하며 성장해가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때의 일이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반성한 사람이라면 지금에 와서는 그때와는 다르게 행동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지금은 맞을까? 애석하게도 알 수가 없다. 어째서냐면 우리의 지금은 다시 또 시간이 지난 뒤에는 그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비틀즈의 '예스터데이'는 불멸의 명곡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시간은 어제가 되고, 우리는 어제..
가을의 발걸음 소리가 자분자분 들려오는 듯 하다.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향기나는 햇발이 쏟아져 들어온다. 한가로운 보사노바 음악에 맞춰 게으른 마음을 다독이다 아, 그 때 생각이 났다. 사랑하던 이에게 차마 말 못하고 감춰둔 마음을 어느 맑은 강물에 흘려보내고 싶었다. 나는 여름의 끝자락에 여행을 떠났다. 홀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버스를 타고, 낯 선 풍경들을 바라보다 이름 모를 정거장에 내렸다. 익숙한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의 삶을 혼자 시작해야 했던 그 시절. 내게 삶과 세상은 커다란 무지(無知)였다. 집을 떠나와 주소도 잃고, 온통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들, 거리들. 무명(無名)의 도시에서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은 하늘과 바람, 별과 구름 같은 것이었다. 나는 외롭고 무서웠다. 내가 내린 곳은 경상..
슬픈 예감저자요시모토 바나나 지음출판사민음사 | 2013-04-02 출간카테고리소설책소개요시모토의 바나나의 젊은 시절을 대표하는 작품. 1988년 말 ...글쓴이 평점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지만 슬픈 예감은 좀처럼 틀리지 않는다. 특히 소설이나 드라마의 초반부를 볼 때 느껴지는 것은 더욱 그렇다. 이들이 사람의 인생을 유난히 닮아 있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문득, 생각이 난다. 슬픈 예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슬픈 예감들만이 사는 별이 있다. 그 별에는 예감의 빛들이 살고 있다. 그중 유난히 강렬하고 파장이 긴 빛이 바로 슬픈 예감인 것이다. 희소식의 예감은 그보다 좀 빛이 약하다. 복권 당첨의 예감은 더욱 더 약할 것이다.(그 별을 찾아가서 이 그룹에게 빛 에너지 방출 특훈이라도 시켜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