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날(2) “누… 누구시오.” 나는 분명히 그렇게 물었다. 그 사람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느닷없는 내 물음에 놀란 그 사람은 우산을 쥔 오른 손에 왼 손을 모으고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합장을 한 거다. 당시 나는 승복차림이었으니, 아마 머리를 기르는 법사겠거니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영주에 조그만 의복공장에서 일하는 여공입니다. 제 행색이 너무 누추해서.. 부처님 앞에 누가 된 게 아닌지.. 죄송합니다.” 그 사람은 대뜸 사과부터 하는 것이었다. 내가 누구냐고 물어본 목소리가 다소 컸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마 내가 화를 내는 것으로 착각한 것 같았다. 기왕 법사 흉내를 낸 김에 그 사람의 이름이며, 나이며, 영주에서 이곳까지 오게 된 사연이며 하는 것들도 알아보고 싶었다. 나는 그 사..
넷째날(1) 딸아, 오늘은 약속대로 너에게 조금 어처구니 없고, 또 너무 지루하게 느껴질지도 모를 이야기를 하려한다. 네가 대학생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녁식사를 하는 식탁에서 그 일을 고백했을 때 아빠는 그저 놀라는 척을 했을 뿐이었다. 네가 진보정당의 청년당원이 되어 노동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속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아니, 아주 오래전부터 그리 되리라고 여겨 마음의 채비를 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아마 네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일 거야. 네 엄마와 혼인은 했지만 아이를 낳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엄마는 너를 뱃속에 품게 되었고, 결국 네가 태어났지. 무정한 아빠는 네가 태어나는 순간을 곁에서 지키지도 않았구나. 네가 태어나고 이틀이 지나서야 출장에서 돌아와 너를 보았다..
내 유년의 업 2007년 봄부터 2008년 여름까지 문산 내포리 작은 숲속에 있던 행복한학교에서 교사로 지내며 참 행복했다. 4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흘렀다. 파주 출판단지에 있던 청미래학교와 합쳐져 12년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파주자유학교'가 된 행복한학교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먼 여정을 끝내고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다. 내게는 고질적인 질병이 있었는데, 바로 편두통이었다. 일주일 중 3일 정도는 편두통에 시달렸다. 온갖 동서양의 처방전을 두루 써보아도 한 때였다. 그러던 것이 행복한학교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다보니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제 난 편두통을 거의 겪지 않게 되었다. 나는 편두통을 내 평생의 지병으로 가져가야할 것이라 체념하고 있었다. 유년시절이란 어쩌면 하나의 사람이 평생 짊어지..
셋째날 딸아, 오늘은 특히 피곤하구나. 무리해서 산행을 한 탓이겠지. 아무튼 아빠는 약속을 지켰다. 부석사에 다녀왔단다. 시외터미널에서도 한참을 버스를 타고서야 닿을 수 있는 곳이지만 어릴적부터 종종 다녀오던 곳이었단다. 나는 공대생이었지만 아주 잠깐 고시 공부를 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 할아버지의 부탁으로 이곳 부석사에 방을 하나 얻어 기거한 적도 있었어. 아들이 고시 공부를 하겠다니까 할아버지는 무척 신이 났던 모양이다. 나는 고작 2개월만에 하산해버렸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 2개월의 시간은 내 마음 속에 뚜렷한 기억을 남겼다.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사람에게는 꼭 하나씩 있게 마련일 거다. 네게도 그런 기억이 있을까. 없다면 아마도 언젠가 그 기억이 너를 찾아 올 게다. 부석사 버스정류장..
둘째날 “여러분, 오늘날 여러분께서 안정된 기반 위에서 경제번영을 이룬 것은 과연 어떤 층의 공로가 가장 컷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여러분의 애써 이루신 상업기술의 결과라고 생각하시겠읍니다만은 여기에는 숨은 희생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즉, 여러분들의 자녀들의 힘이 큰 것입니다.” “성장해 가는 여러분들의 어린 자녀들은 하루 15시간의 고된 작업으로 경제발전을 위한 생산계통에서 밑거름이 되어 왔읍니다. 특히 의류계통에서 종사하는 어린 여공들은 평균연령이 18세입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여러분들의 전체의 일부입니까?” “기업주들은 어떠합니까? 아무리 많은 푹리를 취하고도 조그마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읍니다. 합법적이 아닌 생산공들의 피와 땀을 갈취합니다. 그런대 왜 현 사회는 그것을 알면서도..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 작사/곡 멀고느린구름 하염없이 내리는 비가 머지 않아 그치길 바라고 고단한 네 하루에 햇살이 내려 앉길 기도해 널 나의 맘에 두고 집을 지어서 난 영원히 너를 감싸 주고파 따듯이 세상에 모든 오해가 너를 탓해도 난 영원히 너의 곁에 있을게 함께.. 바람이 찬 거리를 항상 손을 잡고 걷기를 약속해 비가 오는 날에는 나 우산을 들고 있을게 걱정마 널 나의 맘에 두고 집을 지어서 난 영원히 너를 감싸 주고파 따듯이 세상에 모든 오해가 너를 탓해도 난 영원히 너의 곁에 있을게 함께.. 파도가 높고 어두운 밤이라도 그대가 기꺼이 날 불러준다면 난~ 널 나의 맘에 두고 집을 지어서 난 영원히 너를 감싸 주고파 따듯이 세상에 모든 오해가 너를 탓해도 난 영원히 너의 곁에 있을게 난~ 함께..
7일 첫째날 노무현이 죽었다. 딸아, 나에게는 그 일이 큰 사건이었다. 나는 병실에 누워 그 소식을 소리로만 들었다. 간병인들이 수근거리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믿지 않았다. 그런 일이 일어날 리는 없다고 낙관했다. 평소대로라면 하루를 그렇게 보냈을 거야. TV 같은 것은 요 근래 거의 켜지 않았으니까 말야. 헌데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결국 간병인이 화장실에 간 틈에TV를 켰어. 그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나는 혼자 슬픔을 맞이하고 싶었다. 떠들기 좋아하는 간병인 없이. TV 속에는 온통 전 대통령의 사진과 넋이 나간 그 측근들의 표정뿐이었다. 영상과 자막, 소리가 총 동원되어 이건 사실이니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었어. 너도 알다시피 아빠는 그쪽의 지지자가 아니다. ‘아니었다’보다는 ‘아니..
Bye bye Memorial Code-1. Hardboiled Christmas “눈이라구?” 케이시는 E-Book에서 눈이라는 물질을 출력해보여주는 것이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맞아. 지구에서는 예전에 겨울이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얀 솜뭉치 같은 게 있었지. 아쉽게도 화성에는 눈이 오지 않았다. 화성에 건설된 이 스페이스 네이션 ‘지구의 추억’ 은 지구와 비슷한 형상으로 제작되었지만 계절의 변화까지 기대할 순 없는 것이다. 덕분에 이곳은 세월에 관계없이 늘 초여름 같이 따사롭다. “이런 거 보면 가끔씩 지구가 그립지 않아 클레어?” “글쎄... 그리운가?” “넌 여전히 낭만이 없구나.”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움 따위 별 필요 없는 감정이지 않은가. 왜들 그렇게 소모적인 것에 신경 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