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an Prescription - /이엠아이(EMI) 나의 20대 전반부를 소개해보라고 했을 때 이 음반과 이상은(정확히는 당시의 '리채')을 빼놓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나의 청춘은 이상은으로부터 시작되어 이상은으로 마무리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그녀의 음악은 내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상은과의 만남은 당시 하루종일 국내외의 뮤직비디오를 틀어주던 엠넷 채널을 통해서였다. 1999년은 종말에의 기대와 공포가 교차하던 시기였다. 사람들의 마음은 불안하고 공허하기 그지 없었다. 내 마음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나는 고3이었고 때는 여름방학이었다. 매미가 울어대는 소리를 들으며 방안에 혼자 반쯤 누워 엠넷의 뮤직비디오를 보는 데 리채(이상은)의 '어기여 디어라'가 흘러나..
4(완결) 갈게, 나는 웅크리고 앉은 K를 등지고 파란 문으로 걷는다. K는 엷게 흐느낀다. 우스운 눈물이다. K는 어차피 나를 안지도 않을 것이면서, 나를 잃을 것을 염려한다. 내가 갖기는 싫고, 남주기는 또 아깝다는 그런 흔해빠진 마음이다. 나는 K에게 그 정도일 뿐이다. 소유욕의 강도에 따라 존재의 가치를 평가 당하는 그런 정도의 사람이다. 고개를 돌린다. K는 그대로다. 화가 난다. 그에게 욕을 퍼붓고 싶다. 그러기에 이곳은 적절한 장소가 아니다. 달의 뒷편에서 누군가에게 욕을 퍼부은 기억을 간직하고 사는 인생은 얼마나 초라하겠는가. 잠깐, 나는 더 살아가는 것일까. 저 문 뒤에서 더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K의 염려대로 나의 생은 여기서 끝이 나는 걸까. 나는 Y를 사랑했었다. 오랜 열..
3 K의 표정은 월드컵 결승전 후반 마지막 1분, 1대 1 상황에서 자살골을 넣은 에이스 스트라이커 같다. 절망과 공포. 뭐라고? K의 반문. 가지 않겠다고, 나의 응답. 다시 뭐라고? K. 안 가! 나. 조금 전까지 카렌 카펜터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흐르던 까페가 아니다. 음악은 멎고, 테이블도 커피도 모두 사라지고 없다. 곳곳에 잿빛 크레이터가 드러나보이는 달의 표면 위다. K와 나, 그리고 Y가 있다. 미쳤어? K의 말이 거칠어진다. 나는 대답하지 않는 대신 Y에게 ‘미안해'라고 사과한다. 지금 뭐하는 거야?! K의 목소리는 내 심장을 찢을 듯 솟구쳐 온다. 머리가 어지럽다. 두 사람이 먼저 얘기를 해야할 것 같네, 난 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Y는 텅빈 공간에 우뚝 서 있는 파란 문을 가리킨..
나는 어릴적부터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말은 곧 여자아이들의 이상형이 되고 싶었다는 얘기다. - 물론 예수나, 부처, 공자 이런 분들이 다 다정한 남자들이었다는 것도 반영하여 - 다정한 연인, 다정한 남편, 다정한 아빠. 이상의 3종 세트가 내가 꿈꾸는 나의 이상향이다. 내가 그간 읽어왔던 명상서적이나, 순정만화책 등에서도 항상 내가 가장 좋아했고 흡족했던 남성상은 다정한 남성이었다. 지적이면서도 다정하고, 배려심이 깊은 남자. 나는 항상 그런 모습을 꿈꾸어 왔다. 스무살 적의 나는 내가 완전히 다정한 남자라고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저 매너있고, 다정한 말을 하면 다정한 사람인 줄 알았던 시절의 나였다. 겉모습만을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제3자들은 나를 예의바르고 자상한 인간이라고 평가해주었..
2 그래서 말인데, K의 목소리가 진지하다. 응.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우리 서로 정리해야할 것들을 정리하자구, K는 정해진 대본을 읊듯이 말한다. 분명 몇 번이고 되뇌어본 말일 것이라 여기니 피식 웃음이 난다. 너도 참 이럴 때 웃음이 나와? 그래도 우리 사귄 게 자그마치 7년이었다고, K는 당황한 표정이다. 응, 그 7년이 이렇게 기묘한 곳에서 끝이 난다니 웃음이 나오네. 라고 얼버무리고 만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정리한다는 말일까. 7년의 세월을, 그 속에 깃든 갖가지 사연들을, 함께 갔던 장소와 함께 듣던 노래, 그동안 우리가 먹었던 음식의 품목들을 어떤 식으로 정리할 수 있다는 말일까. 사람은 컴퓨터가 아니다. 포맷이 불가능하다. 바탕화면에 있던 것을 폴더의 폴더, 그 폴더의 폴더 속쯤으..
달에서 1 우리가 와 있는 곳은 달의 뒷편으로 추정된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다. 처음 그 자리 그대로였다. 우리는 분명히 대학로 뒷편의 낙산공원 벤치에 앉아 개기월식을 보고 있었다. 11년마다 찾아온다는 개기월식이었다. 우리가 만난 지는 꼭 7년이었다. 지구의 그림자가 달을 완전히 덮어버렸을 때였다. 눈 앞이 캄캄해졌다. 다시 모든 것이 선명해졌을 때는 이곳이었다. 장소가 뒤바뀐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K는 감청색 스웨터에 검은 코트를 걸치고 붉은 털실로 짠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등에는 항상 짊어지고 다니던 통기타 가방 - 그는 그것을 악기를 담는 용도보다는 정말 가방처럼 이용했다. - 이 메어져 있다. 나 역시 늘 입고 다니던 붉은 빛 겨울 코트차림이었다. 한 손에는 애용하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