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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7일 - 둘째날

멀고느린구름 2012. 1. 18. 11:18



둘째날




“여러분, 오늘날 여러분께서 안정된 기반 위에서 경제번영을 이룬 것은 과연 어떤 층의 공로가 가장 컷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여러분의 애써 이루신 상업기술의 결과라고 생각하시겠읍니다만은 여기에는 숨은 희생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즉, 여러분들의 자녀들의 힘이 큰 것입니다.”


“성장해 가는 여러분들의 어린 자녀들은 하루 15시간의 고된 작업으로 경제발전을 위한 생산계통에서 밑거름이 되어 왔읍니다. 특히 의류계통에서 종사하는 어린 여공들은 평균연령이 18세입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여러분들의 전체의 일부입니까?”


“기업주들은 어떠합니까? 아무리 많은 푹리를 취하고도 조그마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읍니다. 합법적이 아닌 생산공들의 피와 땀을 갈취합니다. 그런대 왜 현 사회는 그것을 알면서도 묵인하는지 저의 좁은 소견을 아지를 못합니다. 내심 존경하는 근로감독과님. 이 모든 문제를 한시 바삐 선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딸아, 오늘은 어제 책에서 읽은 몇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어제 얘기한 대로 오늘은 이 책,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라는 책에 대해서 이야기해야겠구나. 너는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을 거다. 네가 태어나기 이전 세대만 해도 ‘아름다운 전태일'이라는 영화가 있어, 사람들이 전태일 군의 이름자 정도는 알았지만 말이다. 이제 너희 세대에게는 영영 잊혀진 사람이 되었을 거다. 전태일 군이 분신한 것이 1970년 11월이었다. 청계천이 지나는 평화시장에서였다. 아빠가 인용한 구절은 태일 군이 박정희 대통령과 근로감독관에게 보내려고 썼던 편지의 일부다. 하지만 그는 결국 편지를 보내지 않았단다. 편지가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지. 


   나는 당시 스물 세살이었다. 태일 군보다 한 살 형이었던 셈이지. 하지만 그와 나의 인생은 참 많이 달랐다. 그가 6명의 시다가 해야할 일을 혼자하면서 1일 18시간이 넘는 살인적인 노동에 시달리고 있을 때, 나는 할아버지가 물려 준 돈을 가지고 조그만 라디오 공장을 차려 청년 자본가로 행세하고 있었다. 나는 당대 최고의 공업고등학교 졸업장을 가지고 있었고, 부산대학교 공대도 2년 다닌 사람이었다. 내 또래의 숙련공들이 공장에서 일해 일당 70원 정도를 받을 때, 나는 주판을 튕기고 공장을 시찰하는 일만으로도 하루에 그에 50배가 넘는 돈을 벌 수 있었다. 그 당시는 다들 그랬던 시절이었어. 나는 그렇게 밖에 말할 수가 없구나. 


  전태일 군은 자기가 일하던 의류업계에서 생명을 담보로 일하고 있는 어린 시다 여공들의 처지를 자신의 일처럼 아파했던 것 같다. 그네들의 처우 개선과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과 함께 본인의 몸을 불태우고 말았다. 분신 시위라는 극단적인 방법은 당시 흔치 않았다. 수많은 동료 노동자들, 대학생들, 지식인들이 함께 슬퍼했고 분노해 거리로 나섰다. 태일 군은 그렇게 자신을 희생해 세상을 바꾸었다.


  그러나 부끄럽지만 딸아. 나는 부끄러운 고백을 할 수밖에 없구나. 나는, 아빠와 같은 사람들은 전태일 군이 희생해 바꾸어 놓은 세상을 다시 그 이전의 세상으로 돌려놓고자 궁리했다. 그리고 상당부분 그런 결과를 낳았다. 여전히 현장에서 노동법은 준수되지 않고 있단다. 노조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수 만의 정규직 노동자들, 그리고 그에 조차 해당되지 않는 비정규직들의 권리에 대해 나는 크게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그런 것들은 기업의 이익에 반하는 것들일 따름이었다.


  내가 안 하던 얘기를 갑자기 늘어놓는 것을 보니 죽을 날이 가까워져 오는 게 틀림없다. 사실,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태일 군이나 아빠가 기업인으로서 했던 과오들에 관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런 것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거다. 물론 내 인생에 한정해서 말이지. 아직은 시간이 남았다. 내가 왜 꼭 이곳에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어째서 1970년의 11월과 전태일 군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 차차 이야기하게 될 거다. 분명, 너에게 이야기하고 떠나게 되리라 생각한다. 아니, 다짐한다고 해야 옳을 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어릴 적 내가 다니던 모교를 다녀왔단다. 다행히도 아직 학교가 남아 있더구나. 영주국민학교. 영주역에서 버스로 한 정거장 정도에 있단다. 내가 다녔던 시절에는 10개 학급 정도밖에 없는 시골의 조그만 학교였는데, 지금은 상당히 큰 규모로 바뀌어 있더구나. 평일인지라 운동장에는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5월의 햇살이 참 따스하고 눈부셨어. 나도 어서 다시 태어나서 그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뛰놀고 싶다고 생각했다. 인간이란 종의 어른이란 참 불행한 생명체가 아닐까 싶다. 행복한 어른이란 것이 세상에 존재할까. 과연. 


  스탠드에 앉아 아이들이 뛰어 노는 양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축구공 하나가 날아왔다. 어린시절의 너를 닮은 여자아이 하나가 쪼르르 달려오더구나. 놀려줄 생각으로 운동장 쪽으로 공을 힘껏 차서 날려버렸다. 그런데 여자아이는 아무 불평없이 공이 떨어진 쪽으로 달려가더구나. 허탈했지. 여자아이는 공을 차지해서는 까르르 웃으며 드리블을 시작했다. 글쎄, 그 일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여겨지진 않는다. 다만 문득 생각을 했지. 내가 내 발로 공을 차본 것이 수 십년만의 일이라는 것에 대해 말야. 발끝에 부딪친 공의 느낌이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어쩐지 살아 있다는 실감을 주었다면 너는 이해하겠니. 


  학교 교무실에 들러볼까 하다가 그만두고 정문을 나서 골목길을 걸었다. 1968년 내가 부산대학교 공대에서 유학하던 시절. 그 즈음에 생긴 걸로 기억하는 떡볶이 가게가 그대로 있어서 놀라웠다. 물론 주인도 가게 모습도 많이 변해버렸지만 같은 자리였고, 가게 이름도 똑같았어. 네가 들으면 웃음이 나올 거다. ‘새마을 떡볶이’라니 지금 보면 얼마나 촌스럽고 이상한 이름인지, 나도 웃고 말았단다. 내 기억으로는 그 가게를 운영하던 아주머니가 새마을 부녀회장쯤 되었던 것 같다. 떡볶이를 먹고 싶었지만 너도 알다시피 먹을 수가 없었다. 또 한 가지 이실직고를 하자면 아빠는 지금 물 이외에는 어떤 음식도 먹지를 않고 있다. 어째서냐고 묻는다면 여러가지 이유를 댈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대부분의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임을 우선 전제해야겠고, 덧붙여 아빠가 여태 경험해보지 못했던 ‘굶주림'이라는 것을 직접 느껴보고 싶다는 게 또 이유의 하나다. 정말로 굶고 있는 가난한 이들이 보기에는 참말 ‘놀고 있구나’라고 여기겠지만 말이다. 


  딸아, 너도 나와 같이 ‘가난'이란 것을 그저 개념으로만 상상하며 살아왔지. 나는 널 부족함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 네가 원하는 온갖 것을 다 가져다 주었어. 나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하던 방식 그대로였다. 그게 사랑이라고만 생각했던 거지. 하지만 우리 세대는 점점 그런 식으로 아이들을 기르면서, 우리와는 전혀 다른 인간을 만들어 온 게 아닐까 싶다. 나는 비록 너와 같이 ‘가난'을 감각하지 못했지만 지독한 가난의 풍경을 보면서 자랐다. 그래서 개념이라고 해도 그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개념이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고 귀에 들려오는 그런 개념이었어. 허나 네가 생각하는 가난이란 그런 것이 아니지. 보지도 못했고, 촉감을 느껴보지도 못했으며, 들어보지도 못한 그런 것이야. 우리는 가난에 대한 현실적 체험이 전혀 없는 인간을 만들었다. 그런 네가 이 시대의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들과 소통할 수 있을까. 나는 자신이 없구나. 


  떡볶이 가게 얘기를 하다가 지나치게 멀리까지 생각이 뻗어왔다.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많다. 본론이라고 할까 하는 것을 아직 말하지 못하고 있다. 용기가 필요하구나. 내일은 부석사에 갈 생각이다. 그곳에서 용기를 좀 얻어왔으면 싶다. 점점 힘이 부치는구나. 이만 쉬어야겠다. 걱정하지 말거라. 노 전 대통령의 말에 공감한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니….




2012. 1. 18.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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