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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7일 - 넷째날(2)

멀고느린구름 2012. 1. 28. 10:19




넷째날(2)




“누… 누구시오.”


  나는 분명히 그렇게 물었다. 그 사람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느닷없는 내 물음에 놀란 그 사람은 우산을 쥔 오른 손에 왼 손을 모으고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합장을 한 거다. 당시 나는 승복차림이었으니, 아마 머리를 기르는 법사겠거니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영주에 조그만 의복공장에서 일하는 여공입니다. 제 행색이 너무 누추해서.. 부처님 앞에 누가 된 게 아닌지.. 죄송합니다.”


그 사람은 대뜸 사과부터 하는 것이었다. 내가 누구냐고 물어본 목소리가 다소 컸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마 내가 화를 내는 것으로 착각한 것 같았다. 기왕 법사 흉내를 낸 김에 그 사람의 이름이며, 나이며, 영주에서 이곳까지 오게 된 사연이며 하는 것들도 알아보고 싶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먼 영주에서 부석사까지 온 연유를 물었다. 


“어머니가 편찮으십니다. 어머니가 불자신데.. 꿈에서 의상대사를 친견하셨다고 합니다. 해서 혹시 이곳에서 불공을 드리면 부처님의 가피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 사람이 한 모든 말들이, 단어와 문장들이 내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 있구나. 이렇게 그대로 옮길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여공의 어머니가 의상대사의 모습을 어떻게 아는지 신기하여 더 캐물으니


“어머니가 편찮으시기 전에는 매주 이곳에 들르셨습니다. 무량수전에서 불공을 드린 후에는 항상 이곳에 와서 의상대사의 초상에 절을 올리고 돌아오셨다고 해요.”


라고 그 사람은 답했다. 나를 조금도 의심하는 기색이 없었다. 순진한 여인이었다. 더 붙잡아 두고 싶어 어머니의 연세며, 어떤 일을 하시는지, 어떤 병을 얻었는지 계속 물어갔다. 어느 덧 그 사람은 조사당 안에 들어와 앉아 나와 마주하고 있었다.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아마 나는 비가 그치지 않기를 바랐다. 비는 점점 거세어졌다. 빗소리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덮어버렸다. 우리 두 사람의 말 소리만이 간신히 빗줄기 사이를 비켜 서로에게 가닿았다. 어두컴컴한 조사당 안에서는 그 사람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제단 위에 놓인 초에 불을 붙이자 다시 그 사람의 얼굴이 또렷해졌다. 아련한 촛불에 비친 그 사람의 얼굴은 더욱 더 아름다웠다. 은은하게 옅은 눈썹은 실바람처럼 고운 선을 그렸다. 검고 맑는 눈동자는 그 위에 단풍잎 하나를 띄워 놓고 싶을 지경이었다. 잔잔한 파도처럼 올라간 코. 연분홍 빛이 도는 작은 입술. 의상대사의 초상이 내려다보는 앞에서도 흑심이 솟구쳤다. 그런 빛을 그 사람이 읽은 것이었을까. 


“그런데.. 말씀드리기 주저했는데… 처사님은 불자가 아니시죠..?”


 반 시간쯤 얘기했을까. 비가 잦아들자,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고는 미소를 띠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가짜 법사님이시지만.. 저의 얘기를 귀담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부터는 가까운 곳이라도 우산을 잘 챙겨 다니세요. 그럼 이만.”


그 사람은 돌아서서 조심스럽게 온 길을 내려갔다. 이번에는 그 사람의 검고 긴 머리가 잔바람에 살랑 거리는 걸 지켜보았다. 꿈인 듯 싶었다. 그 사람이 간 자리를 보니 비닐 우산이 놓여 있었다. 나는 우산을 품 속에 넣고 조사당을 나섰다. 


  그날로부터 매일 나는 그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다. 공장에 다닌다 했으니 평일에는 못 올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알면서도 공연히 기다리게 되는 것이었다. 잠을 쉬이 이루지 못했다. 일주일 가고 다음 일요일이 되어서야 그 사람은 다시 절을 찾았다. 나는 물론 조사당에 자리를 펴고 온종일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만난 우리는 서로 이름을 나누었다. 민아. 그 사람의 이름이었다. 조선에 태어났으면 양갓집 규수의 이름이거나 공주의 이름이었을 것이다. 그런 얘기를 하자 그 사람은 무척 좋아했다. 그 사람과 나는 이번에는 병든 어머니의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사람은 중학교밖에 나오질 못했지만, 일하는 틈틈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읽어 문학에 관해서는 조예가 있었다. 나도 소설이라면 몇 권 읽었으니 얘기가 통했다. 문학 얘기가 끝나면 좋아하는 노래와 영화에 대한 얘기였다. 주말이라도 조사당에는 사람의 발길이 드물어 우리 둘만의 세상인양 끊임없이 말을 주고 받을 수 있었다. 다음 주에는 함께 시내라도 나가보자고 약속을 한 후 그 사람과 나는 작별했다. 세상을 바꾸자고 들어온 부석사였건만 나는 세상을 바꾸기는 커녕 전혀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법전이고 금강경이고,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2012. 1. 28.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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