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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7일 - 셋째날

멀고느린구름 2012. 1. 19. 10:05




셋째날



   딸아, 오늘은 특히 피곤하구나. 무리해서 산행을 한 탓이겠지. 아무튼 아빠는 약속을 지켰다. 부석사에 다녀왔단다. 시외터미널에서도 한참을 버스를 타고서야 닿을 수 있는 곳이지만 어릴적부터 종종 다녀오던 곳이었단다. 나는 공대생이었지만 아주 잠깐 고시 공부를 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 할아버지의 부탁으로 이곳 부석사에 방을 하나 얻어 기거한 적도 있었어. 아들이 고시 공부를 하겠다니까 할아버지는 무척 신이 났던 모양이다. 나는 고작 2개월만에 하산해버렸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 2개월의 시간은 내 마음 속에 뚜렷한 기억을 남겼다.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사람에게는 꼭 하나씩 있게 마련일 거다. 네게도 그런 기억이 있을까. 없다면 아마도 언젠가 그 기억이 너를 찾아 올 게다. 


  부석사 버스정류장 근처는 참 많이도 변했더구나. 예전에는 그저 산의 한 언덕일 뿐이었는데, 지금은 없던 것도 많이 생기고, 여행자들을 위한 숙박시설이니 음식점이니 해서 시끌벅적했다. 산을 오르는데 무릎이니 허벅지니 발바닥이니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래도 어쩌겠어. 오늘은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올랐다. 사실, 육체적 고통은 정신적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갑자기 웬 정신적 고통이냐고? 궁금할 게다. 차차 얘기하자꾸나. 


  그래, 떠올려보면 너희 엄마랑 이곳에 온 적이 있다. 아빠가 스물 다섯이 되던 해였다. 어쩐지 나는 그 시절, 삶에 대한 모든 의욕을 상실한 상태였고, 요즘 유행하는 말로 폐인처럼 지냈단다. 라디오 공장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맡겨놓은 상태였어. 나는 마치 무엇에 겁에 질린 사람처럼 얼굴을 푹 숙이고 집에서만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런 삶이 벌써 1년하고도 수 개월이 지난 때였어. 할아버지는 무언가 전기를 마련해주어야 겠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할머니의 죽마고우 분이 중매를 섰고, 난 어느 중견기업 따님과 영주시내의 한 한식 요리집에서 맞선이란 것을 보았다. 그때 나온 것이 너희 엄마였다. 엄마는 나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첫 만남 이후 계속 연락을 하고 다음 만날 약속을 잡은 것도 엄마 쪽이었다. 세 번째 만남이었을 거다. 너희 엄마가 부석사에 가고 싶다고 했다. 나는 절대 갈 수 없다고 하고, 엄마는 절대 가야한다고 맞섰지. 엄마는 내가 부석사에 자기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혼담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어. 워낙 유망한 기업의 따님이었기 때문에 다급해진 할아버지가 아빠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엄마와 함께 부석사행 버스에 올랐단다. 


  그때의 일이 생생히 기억난다. 나는 오늘 가서 보았던 그곳, 부석사 버스정류장에 내리자마자 눈물을 쏟기 시작해서 부석사에 닿는 그 순간까지 계속 소리없이 울었다. 울어도 울어도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내 속에 얼마나 큰 우물이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더구나. 그 울음은 내가 침묵했던 1년하고도 수개월 동안 내 가슴에 고인 눈물이었다. 처음에 대체 왜 우냐고 되묻던 네 엄마도 어느 순간부터는 조용해졌다. 그저 한 손으로는 내 손을 꼭 쥐고, 한 손으로는 내 등을 토닥여 주더구나. 고마웠다. 기이한 일이지. 스물 다섯살의 남자와 스물 두살의 여자가 산을 오른다. 남자는 하염없이 울고, 여자는 그 남자의 등을 쓸어준다. 그러면서도 둘은 계속 산을 오르는 거야. 그저 멈출 법도 한데. 나와 엄마는 계속 올랐다. 


  딸아, 인생은 신비로운 거야. 어느 순간에는 인생이 인간을 자연스럽게 치유한단다. 엄마는 훗날 그 순간을 이렇게 말하더구나.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렸다고. 이 남자의 등을 쓸어주라고. 꼭 안아주어야 한다고. 네 엄마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으니까, 그럴 법도 하다. 아무튼 우는 남자를 버려두거나 윽박 지를만한 여자는 아니었던 거야. 아빠와 엄마는 부석사에 닿아 무량수전 앞에서 아무 말도 않고 우리가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몇 일 뒤 우리는 결혼하기로 정했다. 


  딸아, 네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은 일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빠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다. 고마움에 대한 답례를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 방법으로 취한 것이 결혼이라는 수단이었어. 엄마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엄마에게 최선을 다했어. 엄마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한 죄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단다. 그 생각은 네가 태어난 후 명백한 실체로 내게 다가왔다. 놀랍도록 공포스러운 실체로 말이다... 


  여기까지 쓰면 부석사에 다녀온 것이 네 엄마와의 추억을 돌이키기 위해서라고 오해할 수 있을 게다. 아니다. 나는 계속 네게 정말로 해야만 할 말을 주저하고 있단다. 그 말을 해야겠다. 내일은 아무 곳도 가지 않고 이곳에서 네게 편지를 쓸 계획이다. 오늘은 더 이상은 무리구나. 딸아, 네 엄마를 사랑해주렴. 


2012. 1. 19.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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