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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61년 6

멀고느린구름 2013. 10. 5. 07:47




  오늘 저녁에 저희 집에 밥 먹으러 오세요. 그이와 말숙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곱단을 돌아봤다. 방금 말 소리가 곱단에게서 난 것이 분명하느냐는 표정이었다. 그이의 손에는 그이가 ‘수레바퀴 아래서’라고 부른 책이 들려 있었다. 그이는 말숙이에게 독일 소설가가 썼다는 그 책의 내용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말숙은 글을 좀 읽을 줄 안다고 소설에 대해서도 아는 체를 하고 있었다. 곱단은 한 쪽으로 물러나 서가에 낀 먼지를 쓸어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말숙은 그이가 마음에 든 눈치였다. 곱단은 물러설 수 없다고 생각했다. 생각만 했을 뿐인데 곧바로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쓸어담을 수 없었다. 밥 먹으러 오시라고요, 싫으세요? 그이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이내 정리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 저녁에 문 닫을 즈음 제가 모시러 올게요 하고 곱단은 책방을 뛰어 나가버렸다. 말숙이 살짝 목례를 하고 뒤를 따랐다. 말숙은 곱단에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느냐고 물었다. 곱단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마음이 깊은 줄은 몰랐다고 말숙은 사과했다. 곱단은 스스로도 무슨 짓을 저질러 버렸는지 모르겠다고 떨었다. 앞이 캄캄했다. 엊그제 선을 보고 혼사까지 오가는 중인 처녀가 남자를 제 집도 아닌 얹혀 사는 집에 초대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곱단은 저녁에 찾아가 실없는 소리를 하고 말았다고 사과를 해야겠다 마음 먹었다. 시간이 금세 흘렀다.  


  노을이 비낀 공터에 서서 곱단은 애꿎은 돌멩이들만 발로 연신 찼다. 책방 불이 꺼지고 그이가 나왔다. 저도 모르게 나무 뒤에 숨어버렸다. 숨을 죽였다. 그이는 문 앞에 걸터 앉아 책을 펴들었다. 무슨 책일까. 무슨 이야기들이 들어 있을까. 저 이의 가슴 속에는 어떤 과거가, 어떤 내일이 고여 있고, 혹은 차오르고 있을까. 곱단은 좀처럼 앞으로 나서지 못한 채 속절없이 해가 저무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황금빛으로 물들었던 하늘에 달이 밝았다. 크고 환한 보름달이었다. 그이는 한참이 지났어도 떠나지 않고 자리에 머물며 책장을 넘겼다. 글자가 보이기나 하려나. 어서 사과하고 저도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시간이었다. 곱단은 치맛자락을 힘껏 쥐고 주춤주춤 앞으로 나섰다. 달빛이 따라왔다. 저기요 하자 그이가 고개를 들었다. 달빛이 쏟아져내린 얼굴이 해사했다. 어쩌면 사내의 얼굴이 이리 고울까. 곱단은 가슴이 떨려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죄송해요 실은 제 맘대로 초대를 해버리는 바람에요... 스르르 바람이 불어왔다. 따스한 봄바람이었다. 아... 저거 보세요. 그이가 말했다. 곱단은 눈을 뜨고 그이가 가르키는 곳으로 눈을 옮겼다. 바람결에 벚꽃잎들이 흐드러지고 있었다. 별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저녁이 안 된다면 댁까지 산책이라도 할까요. 그이가 말했다. 곱단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집까지 걸으며 그이는 곱단의 이름이며, 부산에 오게 된 경위며, 무엇을 좋아하는가 등을 물었다. 곱단은 그이에게 아무 질문도 못했다. 허나 그이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그이는 다음 번에는 정말 저녁 초대를 해달라며 곱단을 집 앞에 바래다 주고는 돌아갔다. 집에 돌아와서는 고모에게 혼인할 처자가 밤이 내린 뒤에도 돌아다닌다며 핀잔을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이와 걸어온 길을 되짚어 걷고 싶었다. 곱단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 마음으로 그 길을 몇 번이고 되짚어 걸었다. 그러다 잠이 들었다. 꿈에서 곱단은 그이에게 푸짐함 저녁 밥상을 내어주었고, 그이는 맛나게 먹었다. 가슴이 한 가득 달빛으로 차오르는 것처럼 행복한 꿈이었다. 다음 날,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대거 마을로 들어왔다. 




2013. 10. 5.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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