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년 5

저녁 밥상

  김곱단 할머니는 다시 말을 멈춘다. 나는 녹음기의 정지 버튼을 누른다. 어느새 석양 무렵이다. 할머니는 말을 지나치게 천천히 했던 것이다. 61년 전으로 타임슬립이라도 한 것 같은 할머니의 정신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일어서며 기재를 켠다. 할머니는 미동도 없다. 눈을 껌벅이는 것을 보니 큰 일이 생긴 것은 아니다. 인터뷰를 하다가 인터뷰이가 사망하는 일은 드물지만 아예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런 경우 초래될 여러가지 번거로운 일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할머니 물 좀 마시겠습니다. 라고 크게 외치고는 냉장고 문을 연다. 물병을 꺼내다가 우연히 찻잎이 든 유리병에 눈길이 멈춘다. 저 병일까. 설마. 물을 마시고 사랑방으로 돌아와 보니 할머니는 정원으로 걸어나가 코스모스와 소국, 해바라기 등을 어루만지고 있다. 거기서 잃어버린 기억이라도 찾으려는 사람마냥. 멀리서 차가운 바람이 휘 불어온다. 꽃들이 일제히 흔들린다. 할머니의 귀밑머리가 바람에 날린다. 노을 색이 짙다. 언젠가 저와 같은 풍경을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느낀다. 언제였을까. 사랑에 빠지게 된 순간들은 기억에 좀처럼 남지 않았다. 내 기억은 늘 사랑이 머물게 된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어째서일까. 헤어진 연인은 종종 내게 자기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어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묻곤 했다. 나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모든 게 라고 답하곤 했다. 하지만 상대는 비교적 명확하게 사랑에 빠지게 된 순간을 기억했다. 그녀는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아무렇지도 않게 기지개를 켜는 걸 보았다고 했다. 마침 노을 빛이 무척 아름다웠고, 그 속에 담긴 내 뒷모습이, 검은 실루엣이 마치 아프리카 초원에 서 있는 외로운 기린 한 마리 같았단다. 그런 걸로도 사랑에 빠지게 되느냐고 되묻자, 그녀는 그런 게 아니면 어떻게 사랑에 빠지냐고 말했다.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먼 데서 바람이 불어오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꽃을 어루만지고, 그 노인의 하얀 귀밑머리가 노을에 물들어 흔들리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지금. 이제서야 나는 헤어진 연인을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다. 오래된 명화를 감상하듯 나는 조심스레 툇마루에 걸터 앉아 오래도록 그 풍경을 바라본다.수 십 분이 지난다. 김곱단 할머니는 툇마루에 걸터 앉은 나를 지나쳐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이것저것 반찬을 꺼내 상을 차린다. 그 모습이 눈물겹도록 자연스러워 잠자코 있는다. 선생님 이것 좀 가져가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상을 들어 사랑방으로 옮긴다. 내 밥 공기에 밥이 왕릉처럼 쌓여 있다. 시장하시지, 어여 들어요. 나는 수저를 들며 할머니, 저녁 진지 드시고 다음 얘기 해주셔야 합니다 한다. 김곱단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한다. 

곱단 : 기억이 났어요. 

나 : 아... 기억이 나셨어요?

곱단 : 그래요. 아이고 선생님 고마워요.

나 : 네? 제가 뭘 한 게 있나요.

곱단 : 내가 평생 살면서 그게 항상 기억이 안나서 죽을 것 같았어요.

나 : 그거라면?

곱단 : 내가 말숙이랑 거기 책방엘 들어가서 유리병을 어떻게 했는지, 말숙이는 그 다음 무슨 말을 했는지, 나는 어떻게 했는지 도통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나 : 아아. 이제 기억이 나셨어요?

곱단 : 응응.

나 : 어떻게 하셨는데요?

곱단 : 내가 진짜 그랬나봐요. 밥 먹으러 오라고, 우리 집으로 저녁을 먹으러 오라고 그랬나봐요. 그이가 늘 날 놀리곤 한 게 내 쪽에서 먼저 자기넬 꼬시지 않았냐고... 그때마다 나는 그런 적 없다고 발뺌을 했었는데 말예요. 이제 떠올려보니 그랬네요. 내가 먼저 그랬었네요... 그 시절에 내가 그랬으니 얼마나 발칙했겠어. 

나 : 할머님, 이렇게 말씀 드리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엄청 귀엽게 웃으시며 말씀하시는 것 아세요?

곱단 : 아, 다 늙은 중늙은이가 귀엽긴 뭐. 

나 : 귀여우셔요. 

곱단 : 말은 무얼 못해. 그이도 그러긴 했어... 모르긴 몰라도 그때는 귀여웠을 거야. 열 아홉 여자애 중에 안 귀여운 애가 어딨겠어요. 

나 : 그래서, 그 책방 어르신께서는 저녁을 드시러 오셨나요. 

곱단 : 왔지요. 것두 그날 저녁에. 

나 : 그날 저녁에요?

곱단 : 응... 

김곱단 할머니의 볼, 주름골 사이로 붉은 물이 든다. 

2013. 9. 29.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