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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61년 10

멀고느린구름 2013. 10. 25. 06:17



다섯 번의 낮과 다섯 번의 밤이 지나가는 동안



  곱단과 그이가 오두막에서 보낸 시간은 닷새였다. 오두막 속에 있는 것은 그이가 아끼던 세 권의 책과 한 사람 분의 모포, 성냥 한 갑, 소련제 반합, 이 주일 분의 쌀, 고구마 대 여섯 개가 전부였다. 곱단은 특히 세 권의 책과 소련제 반합에 눈이 갔다. 책은 세 권 중 한 권은 소련어로, 한 권은 일본어로, 한 권은 언문으로 쓰여 있었다. 그이는 각각 레닌의 <공산당 선언>,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황순원의 <별과 같이 살다> 라고 소개했다. 그이의 말에 따르면 <공산당 선언>은 우리가 지향해야할 시대 이념을, <마음>은 마음의 깊이를, <별과 같이 살다>는 민족애를 대변해주는 책이라고 했다. 소련제 반합에 대해서는 간도에서 적군에 가담했던 시절부터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이의 아버지는 소련 적군의 힘을 빌어 무장 강화를 꾀하고자 했던 간도 독립군의 일원이었다. 애초 독립군에게 군사적 지원을 약속했던 소련 적군은 돌연 자신들의 공산혁명군으로 가담하지 않으면 무장해제하겠다고 통보를 했고, 소련에게 저항하는 쪽을 택했던 그이의 아버지는 무참히 소련 공산혁명군에 의해 처형 당했다. 그이의 어머니로서는 살아남기 위해 아직 고교생 정도의 나이에 불과했던 그이를 공산혁명군에 가담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이는 소련 적군의 일원이 되어 제2차 세계대전의 변방 전투에 직접 참여했다. 다행히 대규모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이는 속으로 항상 여차하면 동지들과 함께 적군을 탈영하여 만주의 독립군에 합류해 한반도 탈환전쟁에 참여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다할 전투도 치뤄보지 못한 채, 1945년 8월 15일 갑자기 해방이 찾아왔다. 그이는 적군의 일원으로 개선 장군처럼 평양에 입성했으나 자신과 조금 위의 연배에 불과한 김일성이 무슨 대단한 민족투사라도 되는 것처럼 행세하는 것에 반발하여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내려왔다. 남로당 조직에서 그이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그이는 응하지 않았다. 그이가 생각하기에는 해방된 조국은 아직 사회주의 혁명을 하기에 알맞은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이념을 앞 세워 사분오열하는 것보다는 민족의 이름으로 뭉치는 것이 우선이라고 보았다. 그이는 여운형 선생의 입장을 지지했다. 하지만 여운형 선생이 이내 암살 당하고 말자 그이는 낙심하여 정쟁에서 벗어나 공부에 좀 더 매진하고자 어머니를 두고 잠시 부산으로 내려온 것이었다. 어머니를 두고 온 것이 오판이었음은 곧 드러나고 말았다. 전쟁이 터진 것이다. 그이의 어머니는 전쟁 통에 서신이 끊기고 말았다. 그이는 품속에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를 늘 품고 있었다. 곱단은 그이의 이야기를 통해서야 빨갱이가 꼭 뿔이 달린 도깨비가 아니란 것을 알았다. 북조선에 찬성하지 않는 빨갱이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사회주의 이상이니 자본주의의 모순이니 하는 말들은 이해되지 않았다. 그이도 곱단에게 굳이 그런 것들을 이해시키려 하지 않았다. 곱단은 그이가 한 말을 기억했다. 정치란 것은 달빛과 같은 거라고, 하나의 태양 빛이 달을 비추는데 그것을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라고. 어떤 이들은 정치를 태양처럼 여기지만, 자신은 태양은 역시 사랑이어야 하지 않는가 싶다고. 


   오두막에서 보낸 첫 밤은 그렇게 그이와 두런두런 지나온 일들을 이야기하며 보냈다. 그이는 저녁이 되자 땔감을 모아 방 한 가운데 불을 지폈다. 그곳에 고구마 두 어개를 던져놓고 함께 모포를 덮었다. 쪽창 밖으로 별이 하나 둘 켜지는 것이 보였다. 모포 속에서 그이의 체온이 그대로 곱단에게로 전해져 왔다. 곱단은 사람이 사는 일이란 게 참 신비롭구나 싶었다. 어제의 삶과 오늘의 삶이 전혀 달랐다. 어제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도 너무도 다른 사람이었다. 사내의 곁에 기대어, 그것도 그이의 어깨에 기대어 언제 찾아올지 모를 파국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이 낯설기 그지 없었다. 그럼에도 행복했다. 곱단은 그 순간 자신의 삶이 쪽창 밖의 별처럼 빛나고 있다고 느꼈다. 다시 오지 못할 순간이라고 느꼈다. 가슴이 떨렸다. 그이는 그런 곱단을 곁에 두고 차분히 책을 읽었다. 곱단도 알 수 있도록 소리내어 읽어주었다. 곱단은 평생 글을 알지 못하고 살았어도 그때 그가 읽어준 황순원 선생의 <별과 같이 살다>는 한 구절 한 구절을 다 기억했다. 평생을 살면서 정말 기억해야할 것은 많지 않았다. 



2013. 10. 25.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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