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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원 모어 타임, 원 모어 찬스 1

멀고느린구름 2013. 7. 17. 22:38




원 모어 타임, 원 모어 찬스 





어? 안녕. 

아... 안녕? 


  둘은 어색한 인사를 나눈다. 무려 11년만의 만남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남의 자리는 6호실 13번 좌석 창측이었고, 그녀의 자리는 6호실 6번 좌석 복도측이었다. 그남이 13번 좌석으로 향하던 중 그녀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낸 것이다. 그녀는 인사를 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럼. 

응. 그래. 

아, 저기... 

응?


뒤쪽에서 사람들이 계속 밀려들었으므로 그남은 말을 채 잇지 못한 채 13번 좌석에 가 앉는다. 열차가 출발한다. 그남과 그녀는 어딘가 불편하다. 분명 서로의 옆 자리에는 낯선 타인이 앉아 있는데, 마치 둘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것만 같다. 서울역에서 출발한 새마을호 열차는 과거에는 가장 빨랐으나, 이제는 느려진 속도로 레일을 달린다. 그녀는 역시 케이티엑스를 탔어야 한다고 후회한다. 그남은 스쳐지나는 저녁의 풍경을 바라보다 표를 꺼내 자신의 좌석번호를 확인한다. 부산행 새마을호 6호실 13번. 이것이 지금 그남의 자리다.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관계없이 그남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다. 열차가 승객을 태우기 위해 역에 멈춰설 때마다 풍경들도 함께 멈춘다. 그남은 아무런 결단도 내리지 못한 채 풍경이 움직이고 멈추는 것만을 관찰한다. 나는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야 라고도 생각한다. 


  그녀는 거울을 꺼내 얼굴을 살핀다. 자신을 들여다본다. 거울 속을, 거울 속의 자신을, 차츰 자신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녀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K대학교의 병원에서다. 경기도 일산에 신도시가 만들어지면서 이사를 갔고, 청소년기에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다시 서울로 옮겨와 대학가에 월세집을 얻어 4년을 살았고, 지금은 망원동에 전세 원룸을 얻어 살고 있다. 문구류를 만들어 파는 회사의 홍보팀에서 일하고 있으며,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회사생활을 조금 지루해한다. 지루한 회사에서 제법 지루하지 않은 남자를 만나 결혼할 계획을 세웠고, 다음 주가 되면 인륜지대사를 치룰 예정이다. 이것이 거울 속에 든 그녀의 지금이다. 그녀는 거울을 접어 손가방에 넣으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한숨의 의미는 모른다. 고개를 들어 옆에 앉아 벌써부터 졸고 있는 중년 남자의 얼굴을, 주름진 이마를, 벌어진 입을, 투박한 손등을 차례로 살핀다. 인생이란 별 게 없다고 결론 짓는다. 모두가 어린 시절을 지나고, 청춘을 거쳐, 중년이 된다. 그리고 노년의 삶을 보내다가 종착역인 죽음에 닿는다. 그녀는 열차가 멈추고 역에서 사람이 오를 때마다 그 사람들의 그룹에 이름을 붙여 본다. 소년... 청년... 중년... 노년... 노년 그룹이 탑승을 마쳤을 때 열차는 이제 고작 대전역을 출발한다. 입을 벌린 채 자던 중년의 남자는 귀소본능에 의해 깨어나 열차에서 내린 뒤다. 그녀는 종착역에 닿을 때까지 누구도 옆 자리에 앉지 않기를 기원한다. 


옆에 앉아도 돼?


불길한 예감은 어째서 틀리지 않는가는 상투적인 표현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좌석 등받이를 굳세게 쥔 그남의 어쩔줄 모르는 표정을 올려다본다. 인생은 어쩌면 이렇게 지루하고 전형적인가. 


그래... 


그녀는 일부러 잘못된 대답을 한다. 그녀는 그남이 앉기 편하도록 창가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남이 잠깐만 짐을 가져오겠다고 말한다. 그녀는 거기까지는 허락하지 않는다. 그남은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그녀가 앉았던 자리에 앉는다. 부산행 새마을호 6호실 6번 좌석은 이제 잠시 그남의 자리가 된다. 


아, 저기. 아까 물어보려고 했던 건. 


그남이 넉살 좋은 사람인 척을 한다. 그녀는 그남의 성격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모르는 채 한다. 혹은 정말은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응. 

물어보려고 한 건... 그러니까, 어디 가는 거냐구. 하하. 

부산. 

아아 부산 가는구나. 나도 부산 가는데.

응. 그렇구나. 

음... 부산은 왜 가는지 물어도 돼?

여행.

아아... 여행가는구나. 

넌?

뭐... 나도 여행이랄까.

으응. 


그녀와 그남의 이야기는 이어지지 않는다. 누군가 너는 예전 그대로구나 같은 뻔한 대사를 내뱉으면 적당한 이야기들이 이어질 텐데, 어느 쪽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그남은 다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본다. 물론, 건너편 좌석 쪽의 창밖이다. 그녀는 그녀가 앉은 쪽의 창을 바라본다. 풍경에는 관심이 없다. 이런저런 상념 속에 빠져든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사이 열차는 다음 역에 멈춰선다. 부산행 새마을호 6호실 5번 좌석의 새 주인이 등장한다. 그남은 어색하게 손을 흔들며 자신이 가진 표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녀는 중립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남을 보낸다. 열차는 다시 흔들거리며 다음 역으로 달려간다. 돌아간 그남의 옆 자리에는 아직 아무도 없다. 그녀의 옆 자리에 앉은 새 남자에게서는 강한 술냄새가 풍긴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린다. 그런 행동이 이 고통을 해결해주지 않으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향취는 옅어지고 만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손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5호실로 향한다. 5호실은 식당칸이다.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녀는 버드와이저를 한 캔 사서 커다란 차창을 바라보게끔 설계된 자리에 앉는다. 거대한 삶의 순간들이 뭉텅뭉텅 지나치는 것을 무감하게 흘려보며 캔 뚜껑을 딴다. 한 모금을 마신다. 파도처럼 입 안 가득 거품이 일었다가 부서진다. 초여름의 바다는 어떨까. 그녀가 보았던 바다는 항상 가을이거나 겨울의 바다. 초여름의 바다를 보는 것은 처음이다. 초여름의 바다에 대해 누군가에게 들었던 기억은 있다. 초여름의 바다는 마치 내일 세계가 멸망할 것을 알게 된 사람의 얼굴과 같아. 그런 문장을 기억해낸다. 그녀의 첫 번째 남자가 했던 말이다. 다른 말들은 잊었지만 어쩐지 이 문장만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남자에게 이 문장을 들었을 때에는 허세가 지나치다고 밖에 여기지 않았건만. 결혼을 앞 둔 여자는 센치해진대. 친구에게 들은 말이다. 사람들은 결국 굳어진 문장들의 범위 속을 떠돌 뿐이다. 이런 말도 누군가 하지 않았겠나 하며 그녀는 맥주를 한 모금 더 삼킨다. 초여름의 파도가 다시 밀려온다. 부서진다. 차창 밖의 노을이 사라진다. 어둠이 머뭇머뭇 세상을 덮는다. 




2013. 7. 17.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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