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다했습니다. 선배님.” 후임 기사가 당황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우당탕하는 요란한 소리가 막 시작된 노르웨이의 숲의 가사들을 지웠다. “아이고 이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내게 연신 정중하게 고개를 꺾으며 사과를 하는 후임 기사의 모습에 왈칵 울음이 솟구쳤다. 입술을 앙다물었다. 꼬았던 다리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사레를 치며 괜찮다고 일렀다. 그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싶어졌다. “너는 진짜, 사사건건 이게 뭐하는 거냐?! 이래 가지고 제대로 일 해먹겠어! 내가 항상 그랬냐 안 그랬냐? 일이 다 끝난 다음에 노가리를 까든지 잠을 쳐 자든지. 참 나... 이 새끼 진짜.” 무뢰한은, 아 선임 기사를 이제 무뢰한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조금은 변했겠지만 평생동안 기억할 만한 곳이 있죠 어떤 것은 영원하고 어떤 것은 더 좋아지진 않았죠 사라져버린 것도 있고 그대로인 것도 있죠 이 모든 곳에는 그때의 순간들이 남아 있어요 후임 기사가 무언가를 중얼거리기에 처음에는 괴이한 혼잣말을 하는 줄 알았다. 나중에서야 그가 ‘인 마이 라이프’의 가사를 무려 실시간으로 번역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정체가 점점 궁금해졌지만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하아... 정말 정말 부럽습니다...” 깊은 탄식을 내뱉으며 그가 말했다. 다행하게도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지는 않았다. 후임 기사는 놀이동산에 처음 방문한 꼬마처럼 빛나는 눈동자로 여기저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조금 무리해서 인테리어를 한 보람이 있..
5분 정도가 지났을 때 후임 기사가 신문지를 한 뭉텅이 들고 나타났다. 선임 기사는 어김 없이 핀잔을 주었다. 고작 그 정도 가져와서 어쩌자는 거냐고 나더러 들으라는 듯이 보일러실 안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분명히 카펜터즈는 노래하고 있었지만 전혀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쾌함이 솟구쳤다. 여기는 내 집이다. 내 집의 공기를 빙하기 이전으로 돌려놓을 권리가 저들에게는 없다. 푹푹 한숨을 내쉬며 한 켠에 모아둔 이면지 여러 장을 집어들고 주방으로 갔다. 듬성듬성 놓인 신문지 사이의 간극을 이면지로 채웠다. 후임 기사가 어쩔줄 몰라하며 꾸벅꾸벅 인사를 했다. 지나친 예의는 부담스러웠다. 선임 기사가 보일러실에서 나오며 이면지로 보충된 바닥을 보고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아, ..
“아, 죄송합니다. 선배님!” 후임 설치기사는 소리 높여 정중하게 사과했다. 이어서 나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보일러실 쪽으로 절도 있게 걸어 갔다. 선임의 핀잔이 날아들었지만 그는 의연했다. 곧 선임 기사가 보일러실에서 나왔다. “신문지 없어요?” 앞 뒤 맥락이 전혀 없는 질문이었다. “네?!” 라고 물어도 선임 기사는 신문지가 있어야 하는데 라는 말만 반복했다. 내 어리둥절한 표정을 읽은 쪽은 역시 후임 기사 쪽이었다. “보일러실까지 갈 때 신발을 신었다 벗었다하는 게 영 번거로운 일이라서요.” 그제야 나는 아아 라고 깨달음의 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신문지가 하나도 없어요.” 나는 일간지 신문 구독자가 아니었으며, 매일 아침마다 지하철 역 앞의 무가지를 일일이 챙겨보는 타입도 전혀 아니었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소식 가지고 왔습니다.” 반사적으로 문을 닫아버렸다. 이건 또 뭔가. “형제님, 잠깐만 시간 내주십쇼. 좋은 말씀 한 번 들어보세요.” 저는 아저씨 같은 형을 둔 적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대신 음악을 켰다. 스피커의 볼륨 다이얼을 신경질적으로 돌렸다. 택스맨~ 이라고 외치는 목소리는 존의 것인지 폴의 것인지 잘 모르겠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끈질긴 형제였다. 폴인지 존인지가 다시 한 번 더 외쳤다. 택스맨~ 복음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이런 일까지 겪고 나니 더욱 열이 올랐다. 최근 통화목록에서 가스보일러 설치..
비틀즈, 기억하고 있습니까 나는 신경질이 나 있었다. 분명히 11시까지 오기로 한 가스보일러 설치기사가 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11시 이후에 약속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주말에 외출해서 사람을 만났던 것이 재작년 겨울인가 그랬다. 아무려나 내가 유일하게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끔 허락된 시간을 한낱 가스보일러 설치기사가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다는 점이 괘씸했다.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람, 만나게 되면 한껏 모욕을 해주리라 다짐했다. 오기로 한 11시에서 벌써 34분이나 지났다. 전화 한 통 조차 없었다. 아마도 4,50대의 곤색 점퍼차림에 머리는 군대 상사를 연상케하는 부스스한 곱슬머리일 것으로 예상되는 중년의 남자에게 어떻게 하면 모욕을 선사할 수 있을까. “이 업체는 정말 훌륭하..
상우의 목소리가 페이드 아웃되면서 카오디오도 함께 꺼져버렸다. 다행히 시동은 걸려 있는 상태였다. 언제 또 무슨 문제가 발생할 지 알 수 없는 차였다. 클러치에서 발을 천천히 떼고 들어왔던 곳으로 차를 몰아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들어왔던 곳으로는 나갈 수가 없는 구조였다. 차들이 계속 대로 쪽에서 한강 공원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출구를 찾아야 했다. 차를 돌려 반대편으로 가보았다. 디스토피아를 그려보았던 곳까지 이르렀지만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걸을 때는 흔하게 보였던 것 같은 안내지도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면서 정유소를 본 기억은 없었다. 난감했다. 주변을 좀 더 잘 살펴보려고 내려놓았던 차창으로 차 뒤편에서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점점 다가오고 있고, ..
얼마가 지난 걸까. 카누를 타고 노를 저어 달빛에 물든 강물의 한 가운데까지 나아갔다. 술잔을 물결 속으로 담궈 달빛을 길어올리다 황금물결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온 몸이 젖었고, 양볼을 개구리처럼 부풀린 채 깊은 강물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황금의 빛은 점점 사라지고 공포스런 어둠이 사방을 휘감았다. 물은 점점 차가워졌고, 온 몸이 얼어붙기 시작한다고 느낀 순간 정신이 들었다. 까무룩 잠이 들었던 것이다. 온몸에 으슬으슬 한기가 돌았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다. 10분 정도 잠이 들었다. 하지만 어쩐지 전혀 다른 시간 속을 살다 돌아온 기분이었다. 앉아 있던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현기증 일어 한 번 주저앉고 말았다. 두 번째 일어날 때는 이상이 없었다. 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