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나는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아니,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이별을 했던 날이었다. 우리는 홍대거리에 있는 마음에 가기로 했다. 나는 그와 예전부터 그곳에 가고 싶었다. 마음. 바이면서 찻집이기도 한 곳. 그저 단순히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신비주의 전략의 가게들 중 하나일 뿐이었지만, 왠지 그곳은 특별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곳에 가면 그의 마음, 그의 진심을 알 수 있을지도 몰라. 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곳을 마음속에 담아두었고, 인터넷에서 마음을 방문해 본 사람들의 후기도 꼼꼼히 체크해 놓았었다. 마음으로 가는 길은 방향치인 나의 머릿속에서도 정확하게 그려져 있을 정도였다. 나는 ‘반드시’ 그곳에 가야했으므로 약도를 ..
6 “나 태어났을 때도 지금처럼 겨울이 다가오려는 때였겠지? 엄마와 아빠는 가난했고 언니는 아직 어렸었어. 아빠는 배를 타러 나갔다가 가끔씩만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느날에는 돌아와보니 엄마의 배가 불러 있는 거야. 아직 20대 초반의 청년에 불과했던 두 사람은 서로를 온전히 믿을 수 없었나봐. 아빠는 술을 먹고 엄마를 두들겨 팼고, 그 와중에도 엄마는 배로 날아오는 발길질만은 피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했대. 임신 중절 약을 먹으라고 강요하는 아빠를 피해 외할머니 집으로 도망갔다가 머리채가 잡혀서 끌려나오기도 했다고 해. 어느 날은 외할머니가 사가지고 온 델몬트 주스에 약을 몰래 타넣기도 했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엄마는 급히 화장실로 가서 다 토해버렸어. 아빠가 배를 타러 나간 사이에 간신히 나는 태어났어..
종로에서 친구와 헤어지고 혼자 길을 걸었다. 종묘에서 안국역까지. 인사동길을 가로질렀다. 토요일이라 사람들이 붐볐다. 루체른에서의 나와 그를 닮은 외국인들이 보였다. 남극탐사대원처럼 패딩점퍼에 방한 마스크와 두터운 목도리까지 여러겹한 사람은 남국에서 왔을 것이었다. 한편 북국에서 온 외국인들은 한결 여유로워 보였다. 이쯤이야 라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항구도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외국인의 모습이 이제는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지도 위에 있는 검은 점 어디에서나 다른 검은 점으로 이동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고, 자신이 태어난 세계에 불만을 품은 이들은 여행자가 되기를 꿈꾸었다. 이국의 여행자가 되어 고국에 대한 향수병을 느낀 뒤에야 내가 태어나고 살았던 곳이 그리 나쁘지 않았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걔..
그러면서 남자친구가 풀어놓는 태양계 속에 자리한 아홉개의 행성과 60여개의 달에 관한 이야기는 끝도 없는 항해로로 내 마음을 떠밀었다. 어느 지점부터인가 나는 키를 놓았고, 노를 버렸다. 남자친구가 황급히 떠나간 호텔 침대 위에 누워서 아침 햇살을 맞았을 때는 먼 우주를 유영하는 보이저 1호가 된 기분이었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을 혼자 걷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불안감. 남자친구는 보이저 1호는 인간이 만든 것 중에서 지구에서 가장 멀리 가 있는 물체라고 했다. 보이저 2호가 뒤를 따르고 있지만 둘은 아마도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거라고도 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문득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를 떠올렸던 것 같다. 시차를 달리해 태어난 두 성별의 인간은 어쩌면 1977년 8월과 9일에 각각 우주로 쏘..
의사의 첫마디는 각오를 하셔야 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대체 무슨 각오를? 이라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드라마 대사는 현실을 복제했고 현실은 드라마 대사를 복제하는 세상이었으니까. 유방암이라고 했다. 비극의 드라마가 다 그렇듯이 초기는 아니었다. 중기와 말기의 사이라고 했다. 가파른 언덕을 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언덕을 넘어가면 쉼터가 나올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올라왔던 비탈길로 고꾸라져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물론 의사가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마음 속의 번역일 뿐. 병원을 나오는 길에 엄마의 손을 잡았다. 나보다 작은 손. 창백한 손. 남자친구는 칼 세이건의 말을 인용해 지구를 표현하기를 즐겼다. 창백한 푸른 점. 엄마의 손은 창백한 하얀 점. 그 손에 지구의 운명이라도 달려있는 듯 조심스..
집과 가장 가까운 편의점에서는 갖가지 이름의 생수를 팔았지만 보리차는 팔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옷깃을 여미고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슈퍼마켓까지 걸었다. 걷는 도중 진눈깨비를 맞았다. 첫눈이라면 첫눈이라고 할 수 있었다. 휴대폰을 들어보았다. 새벽 5시 36분. 시계를 보려는 것은 아니었다. 남자친구는 마지막 힘을 다해 잠을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슈퍼마켓에 도착했다. 스스로의 머리를 쥐어박을 수 밖에 없었다. 세상에 새벽 5시 39분에 문을 열고 있을 슈퍼마켓은 없다. 아마도 없을 것이었다. 소득도 없이 발길을 돌렸다. 진눈깨비는 등과 어깨 이마, 볼, 입술, 손등과 손가락 마디에까지 내려앉았다가 이내 홀연히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도깨비 같은 눈이라서 진눈깨비라고 했을까. 안개 속에서 귤빛 헤드..
2 고양이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아니, 어쩌면 고양이를 걱정하는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트위터의 타임라인에는 다가오는 겨울 들냥이들이 동사하거나 로드킬 당할 것을 걱정하는 이들의 글이 많아졌다. 날이 추워질 수록 다들 문을 꼭꼭 닫아 놓기에 고양이가 몸을 녹일 곳은 없어지고 결국 고양이는 가장 따뜻한 자동차 엔진 밑으로 기어들어가 있는 다는 것이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자동차 밑에 가장 따뜻한 겨울을 보내는 고양이가 잠을 자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알 필요도 없어 했다. 타임라인에서는 모쪼록 차량 시동을 걸고 출발하기 전에 자동차 아래를 살펴봐달라는 당부를 했다. 나는 지킬 수 없었다. 나는 자동차가 없었다. 대신에 길을 걸을 때마다 자동차 아래를 들여다보는 습..
고양이가 있었다 1 고양이를 본 것은 검은색 세단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간 후였다. 적막한 어둠을 간신히 밀어내는 것 같은 희미한 울음 소리가 나는 쪽으로 눈길을 돌리자 거기 검고 조그만 고양이가 있었다. 고양이에 대해 자세히 아는 바는 없었다. 그렇지만 한 눈에도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 고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양이는 멈추지 않고 계속 울었다. 주변은 캄캄했고, 달은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뒤돌아서서 50미터 정도 걸었다. 아기 고양이의 울음 소리가 내 팔꿈치에서라도 새어나오는 듯 선명했다. 안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새로 산 스마트폰을 꺼내 손전등 어플을 구동했다. 앞이 환해졌다. 그러고도 잠시간 망설였다. 어느 순간은 울음이 멈췄다. 몇 걸음을 앞으로 더 걸어나가 보았다. 곧바로 다시 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