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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 경북콘텐츠진흥원 편 <시대의 바람, 경북역사인물뎐 : 이야기의 힘II>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박열 의사. 



1923년 9월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 박열과 그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는 자신들의 아나키즘 운동 단체인 ‘불령사’의 조직원 김중한을 상해에 보내 폭탄을 밀반입하여, 그 결혼식 장소에 투척할 모의를 했다. 그러나 계획은 뜻대로 실행되지 못했고, 생각에 그친 채로 시간이 지나갔다. 그러던 중 8월 말경 갑자기 동경 경시청 경찰들이 불령사 비밀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당시 함께 책을 읽고 있던 박열, 가네코 후미코는 물론 검거 소식을 듣고 모처에 은둔했던 조직원까지 총 16명이 영문도 모른 채 압송되었다. 경찰의 압송 사유는 ‘치안경찰법’ 위반이었다. ‘불령사’가 불온한 모임을 갖고, 일본에 대해 위해를 가할 행동을 모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박열과 가네코가 모의한 내용을 경찰에 흘린 것이었다. 대체 누가? 박열과 가네코는 마음 속으로 분개했다. 그 계획은 정말로 그저 자기네들끼리 모의한 차원에 불과했기에 아무런 실행에 옮긴 바도 없고, 외부에 발설한 바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내부자의 소행이 아닌가. 허나 한편으로는 그 밀고자의 말 외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을 사건이니 그네 둘이 끝까지 침묵한다면 무혐의로 풀려날 것이 자명한 일이었다. 박열과 가네코는 압송되어 가며 서로 눈짓으로 침묵할 것을 묵약했다. 


경찰의 조사는 당연히 지지부진했다. 아무런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불령사 조직원들이 경시청에 끌려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고 말았다. 동경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경시청의 전화통은 쉴 새 없이 울려댔다. 경찰들은 목전에 닥친 사건사고를 해결하느라 모두 출동하고, 경시청은 하루종일 텅텅 비어있기 일쑤였다. 결국, 일보 위해 계획의 물증을 찾기도 어렵고, 불령사의 불온함을 특별히 증빙할 자료조차 확보되지 않아, 불령사의 ‘치안경찰법’ 위반은 무혐의 처리가 되었다. 그리하여 체포된 지 1년 뒤인 1924년 8월, 조직원들이 모두 석방되었지만, 박열, 가네코, 김중한만은 제외됐다. 이들에게는 ‘치안경찰법’대신 ‘폭발물 취제규칙’ 위반 혐의를 새롭게 건 것이었다. 박열은 증거를 대라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러자 경시청 형사의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들은 사람이 있어.”

“그게 누구요?”

“니야마 하쓰요. 김중한의 애인이지. 그 이가 다 불었어. 박열, 가네코 너희 둘이 김중한에게 상해에 가서 폭탄을 가져오라고 지시를 했다고 말이야.”


박열은 잠시 멈칫했다. 형사는 놓치지 않고 박열의 표정과 행동을 기록했다. 결국, 김중한은 해당 지시를 받은 바 있다고 실토하고 말았다. 그러나 폭탄의 사용출저는 전혀 몰랐다고 증언했다. 덕분에 김중한은 ‘폭발물 취제규칙’ 위반 혐의만이 적용되어 별도 사건으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박열과 가네코에게는 다른 죄명이 붙었다. 일본제국 형법 73조 ‘일본 황실에 관한 범죄’, 즉 ‘대역죄’였다. 박열과 가네코는 항변의 기회도 갖지 못한 채 대역죄를 범한 용의자가 되고 말았다. 


박열과 가네코가 수감되어 있는 사이 일본 사회는 수감 전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 대진재를 틈타 일본 우익 세력이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를 소탕할 목적으로 유언비어를 유포한 것이었다. 즉, 불령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대지진의 혼란을 틈타 우물에 독약을 타고, 건물에 불을 지르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분노한 일본인들은 떼로 몰려다니며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고 다녔다. 당시 재일유학생 단체가 발표한 것에 의하면 공식 집계된 조선인 희생자 수만 4,900여명에 달했다. 곧 일본 정부측이 대진재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는 비난 여론이 재기되기 시작했다. 정부측에서는 이 비난을 면피할 사건이 필요했다. 그리고 마치 그들의 눈에 박열과 가네코가 들어왔던 것이다. 





예심을 맡은 판사 다테마쓰 가이세이는 공명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만약 자신이 박열과 가네코의 ‘대역죄’ 혐의를 확정할 수만 있다면 정부의 중책으로 중용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무런 물증도, 정황 증거도 없었다. 둘의 대역죄를 확정하자면 오직 그들의 ‘자백’을 이끌어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테마쓰는 회유책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박열과 가네코에 대해 파격적인 특별대우를 해줬다. 이치가야 형무소에 수감된 두 사람은 사복을 입을 수도 있었고, 마음껏 자유시간을 누릴 수도 있었다. 때로 다테마쓰는 두 사람을 취조한다는 명목으로 예심 재판정에 불러놓고, 화장실을 다녀온다는 핑계로 두 사람만 둔 채 한참 동안 나가 있기도 했다. 박열이 모친의 형무소 방문을 만류하기 위해 잘 지내고 있다는 증거로 사진을 찍어 보내기를 원하자 가네코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진이 외부로 유출되면서 일본 내에 대역죄인을 특별대우한다는 비판 여론이 거세게 일어났고, 다테마쓰가 사임하는 것은 물론, 일본의 총내각까지 사태하는 일이 발생했다. 다테마쓰의 회유는 끝내 실패했고, 박열과 가네코는 심문을 받을 때마다 자백은 커녕, 자신들의 아나키즘 사상을 담은 글을 써와 낭송회를 열뿐이었다. 그러나 암살 계획을 마음에 품었다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대역죄는 성립이 되어버렸고, 예심은 그대로 확정이 되어 대법원의 결심 판결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일본의 양심적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는 자발적으로 이들의 변론을 맡아 끝까지 항변하였으나 일본정부의 힘에는 역부족이었다.


1926년 3월, 박열과 가네코는 대법원 법정에 서기 이틀 전 후세 다쓰지에게 혼인신고 수속을 부탁했다. 죽음을 앞두고 둘은 백년가약을 맺은 것이었다. 후세 다쓰지는 이들의 뜻을 받아 우시고메 구청에 그들의 혼인신고서를 제출했다. 이 신혼부부의 호적지는 이치가야 형무소였다. 이제 막 신혼부부가 된 박열과 가네코는 대법원 법관 앞에 마치 결혼식을 올리는 연인들처럼 나란히 섰다. 일본의 법정으로서는 기묘한 풍경이었다. 박열은 조선 사모관대의 예복을 입고 있었고, 가네코는 조선의 여인들이 입는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 차림이었다. 박열은 공판이 있기 전에 네 가지 조건을 내걸었던 것이다. 첫째, 자신은 피고인이 아니라 조선의 대표로서 법정에 선다. 둘째, 좌석은 재판장과 대등한 좌석으로 한다. 셋째, 자신은 조선의 예복을 입고, 조선어를 사용한다. 넷째, 재판 전에 조선민족의 대표로서 선언문을 낭독한다. 대심원 심판부와 협의 끝에 둘째항과 셋째항의 조선어 사용 조항만을 제외한 다른 모든 조건이 수용되었다. 그에따라 박열은 재판이 열리기 전 품에서 선언문을 꺼내 낭독하기 시작했다. ‘음모론’, ’나의 선언’, ‘불령선인이 일본 권자계급에게 준다.’를 낭독하는 박열의 목소리가 일본제국 대법원의 재판정 내에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판결이 내려졌다. 사형! 박열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 가네코는 “만세!”를 외쳤다. 재판장은 이 두 사람이 보인 불굴의 의지에 감동했다. 그는 훗날 두 사람을 옹호하는 발언을 해 파면당하고 말았다. 허나 아마도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조금쯤 마음의 죄의식을 덜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일본 사회를 뒤흔들었던 세기의 재판. 그 과정에서 보여준 박열과 가네코의 의기는 아직도 일본인들의 가슴에 남아, 오늘날 그들의 발길을 경북 문경에 위치한 ‘박열 의사 기념관’과 ‘가네코의 묘소’로 이끌고 있다. 


2014. 12. 8.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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