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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서로의 조각

멀고느린구름 2018. 4. 4. 08:30




서로의 조각



도시가 순백의 스튜디오에 놓여 있는 것 같은 날이었다. 그녀는 어젯밤에 그남의 문자를 받았다. 아무래도 너네 집에 두고 온 것 같아. 1년 전에 헤어진 남자였다. 설령 뭘 두고 갔어도 하다못해 도깨비가 주워 갔을 세월이었다. 잃어버린 본인도 모르는 것을 그녀가 알 리가 없었지만, 그녀는 공연히 밤새 집을 뒤져보았다. 그남이 두고 간 것이 끔찍하게도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침이 왔고, 평소처럼 뿌연 안개가 세상을 가렸다. 그녀는 그남의 지문조차 발견하지 못했고, 참 다행이라 여겼다. 그녀에게 그남은 남아 있지 않았다. 상쾌했다. 


하지만 문득 그녀도 무언가 비어 있다고 느꼈다. 옛날에 즐겨 듣던 노래의 제목을 잊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게 뭐였더라. 그녀는 출근 준비도 하지 않은 채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다 그녀는 C를 떠올렸다. 아, 맞아 C의 집에 두고 온 것 같아. 그녀는 C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출근을 위해 칫솔을 입에 물었지만, C는 가글 거품처럼 커져갔다. 물로 다섯 번을 행궈 봤지만 C는 여전히 그녀의 입안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회사에 전화를 걸어 지독한 독감에 걸렸다고 했다. 창 밖에는 안개인지 미세먼지인지 그 둘의 콜라보인지 알 수 없는 희뿌연 기체들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C에게 문자를 보내자고 마음 먹었다. 아무래도 너네 집에 두고 온 것 같아. C는 곧 문자를 읽고, 답을 보냈다. 적어도 응답률 부분에서는 확실한 남자였다. 제 성격을 잘 아시겠지만 당신의 물건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녀는 물론 C의 성격을 잘 알았다. C는 현관에 놓인 신발의 각도가 1-2도 변한 것까지 알아차리는 사람이었고, C의 물건에는 모두 공식적인 지정석이 있었기에, 그녀의 물건이 생뚱맞게 어딘가에 머물러 있을 가능성은 지금 갑자기 배우 조인성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청혼할 확률보다 낮았다. 그녀는 차라리 조인성의 전화를 기다리는 편이 낫겠다 싶어 C에게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혹시 K인가 잠깐 떠올렸다가 빠르게 딜리트 키를 연타했다. 


그녀는 쓸데없이 길게 남아버린 하루를 어떻게 써야 하나 고민했다. 일단 배를 채우자 싶어 냉장고 야채칸에 넣어둔 사과를 꺼내 한 입 베어 물며 식탁에 앉았다. 그때 엄지 발가락 끝에 무언가 픽 닿았다. 희끄무레한 것이 손톱 조각 같아 보였다. 그녀는 안경을 꺼내 쓰고 발가락 끝에 닿은 그것을 에도가와 코난처럼 살폈다. 


손톱 조각은 분명 아니었다. 도무지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하지 않으면 영영 알 길이 없을 정도로 기묘한 무엇이었다. 그녀는 찝찝하기 짝이 없는 그것을 휴지에 싸서 쓰레기통에 넣어버릴까 싶었지만 혹시 이것이 그남이 여기에 두고 갔다는 그게 아닌가 싶어 망설였다. 쓸데없는 고민은 길게 하지 않는 게 좋다. 그녀는 미확인물체의 사진을 찍어서 그남에게 보냈다. 그남은 C에 비해 응답률이 현저히 떨어지는 남자였기에, 그녀는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여유롭게 사과 한 개를 다 먹고, 씨디피에 날씨에 어울리는 음반도 넣을 수 있었다. 


소파에 모로 누워 엘라 피츠제럴드가 “룩 앳 미-“라고 노래하는 것을 듣는 순간 그남의 답장이 도착했다. 바로 그거야. 그녀는 그남에게 택배로 보내 줄 테니 주소를 알려달라고 보냈다. 그남은 다시 한참 뒤에야 주소를 보냈다. 그녀는 엘라 피츠제럴드의 노래가 다섯 번 끝날 때까지 C의 문자를 기다렸다. 혹시 그녀가 찾아낸 것 같은 미확인물체가 C의 집에, 혹시나 욕실의 타일 사이에라도 끼어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녀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C가 자신의 집에서 무엇이라도 찾아내 혹시 이거냐고 물어 온다면, 그녀는 진범을 발견한 셜록 홈즈처럼 답하리라. 바로 그거야. 



2018. 4. 4. 장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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