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는 산책 취미는 산책이다. 예전에 누군가 취미를 물어오면 국민대답을 하곤 했다. 그러니까 독서라든가, 음악감상 같은 것. 대학생이 된 후로는 자의식이 강해져서 매우 용감하게 ‘노래방’이라고 응답하기도 했지만, 노래방을 취미로 삼는 청년에게 세상이 참 비정하다는 것을 몇 번 경험한 후 그만두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독서와 음악감상으로 돌아오고 말았는데, 왠지 그런 대답을 하고 난 뒤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워지곤 했다. 나의 이유 없는 발길질에 고통을 당한 돌멩이가 한 둘이 아니다. 돌멩이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한다. 그렇게 나는 취미에 대한 의례적인 질문에 의례적으로 답하는 의례적인 인간이 되어, 아무렇게나 세상을 살아오고 있었다. 그러다 엊그제 홍대 골목길들을 여느 때..
정도전과 민주주의 (2) 정도전은 왕족들과 문벌귀족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정치와 백성의 전반적인 삶을 돌보기보다는 불교를 통해 개인적 구원만을 추구하는 지도층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두 가지의 큰 그림을 그렸다. 하나는 신권에 의해 왕권이 규제되는 정치제도, 또 하나는 불교라는 종교가 구심이 된 종교 중심 사회에서 상식이 중심이 되는 인문사회로의 대전환이다. 전자는 을 통해 후자는 을 통해 각각 구체화되기에 이른다. 정도전이 꿈꾼 사회는 '상식을 갖춘 백성(民)'이 그 중심에 서는 사회였다. 이는 당시 세계사적으로 볼 때도 혁신적인 변혁이었다. 물론, '민본사상'은 앞서 밝혔듯이 공자에 의해 인류사에 일찍이 출현한 것이다. 허나 그것을 실제적으로 사회에 제도로서 구현시키고 500년 이상을 지속시킨 사례는 거..
동경대전 1 - 김용옥(도올) 지음/통나무 정도전과 민주주의 (1) 드라마 '정도전'이 조금씩 인기를 끌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 아직까지는 미풍에 그치고 있으나 조만간 태풍이 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는 모양이다. 최근 나는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도올 선생께 선물 받았다가 헌책방에 내놓은 걸로 화제가 되었던 책을 다 읽었다. 라고 하는 긴 제목의 책이다. 도올 선생의 책 중에는 종종 서문만 있고 본문은 없다는 비판을 받는 것들이 있다. 아마도 이 책 역시 그런 책의 목록에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동경대전'이라는 제목 탓이다. '동경대전'은 동학의 창시자 최수운이 후계자인 해월 최시형에게 남긴 동학의 바이블이다. 독자들은 아마 이 책을 통해 그 바이블의 내용을 들여다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겠지만 책을 펼치면 ..
어쩌면 그곳은 아름다울지도 - 야콥 하인 지음, 배수아 옮김/영림카디널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이어지는 기다란 고리를 "난 분명 죽게 되겠죠?"갑작스런 질문이었다. "난 죽고 싶지 않아요. 죽는 건 정말 소름끼쳐요.""아닐 거예요, 슈타르크부인.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 끔찍하지만은 않을지도 몰라요." 어머니가 대꾸했다. "도리어 어쩌면 그곳은 아름다울지도 몰라요. 아직까지 죽음에서 돌아온 사람이 없는 걸 보면." -73p- 이상은님의 미발매 음반을 구했다. 너도 나도 경제타령을 애창곡으로 부르고, 자본의 부속물이 되어가고 있는 세상에서 내게 유일한 기쁨은 예술을 하고 예술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정판으로 구입한 이상은님의 음반은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나의 삶을 다시 한 번 힘껏 밀어올려준다. ..
'새정치'의 팬덤이 되려는 이들에게 序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연일 정치인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표를 원하는 그들의 목소리 속에서 정작 2013년을 뜨겁게 달구었던 정치 현안들 - 공공산업 민영화(혹은 영리화), 국정원 대선 불법개입 등등 - 에 대한 관심은 사그라들고 있다. 120석이 넘는 의석을 가진 다수 야당은 새로 등장한 대안 세력에 표를 뺏기지 않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고, 집권 여당은 지지층만 잘 유지하면 그만이라는 듯이 반대쪽의 의견에는 전혀 귀를 기울일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한 때 '통합진보당'이라는 이름은 대중적 진보정당을 희망하는 이들의 대표명사였지만 지금은 분열과 패배의 낙인이 되고 말았다. '진보당'은 종북논란에서 쉽사리 헤어나지 못하고 있고, '정의당'은 대중적 진보정당이..
콘탁스 G렌즈, 그리움의 빛을 담다 내가 현재 쓰고 있는 카메라는 올림푸스에서 미러리스의 역사를 새로 쓰면서 출시한 E - P1, 통칭 펜(PEN)이라고 불리는 기종이다. 이 카메라를 처음 본 순간 이 녀석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바로 나의 이상을 실현해줄 카메라는. 어릴 적부터 카메라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여느 집에나 있을 법한 흔한 똑딱이 카메라가 집에 한 대 있었고, 그것도 별로 쓰임이 많질 않아서 다락방 어딘가에 먼지를 먹고 있을 뿐이었다. 대학교 22살이 될 무렵까지 휴대폰 하나 갖고 있지 않았던 나는 특별히 사진을 찍을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22살이 되던 어느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중국에서 제작된 싸구려 디카를 하나 사게 되었다. 그 녀석의 애칭은 '파람이'였다. 이후 나..
뮤지엄 아워스 (2014) Museum Hours 7.8감독젬 코헨출연메리 마가렛 오하라, 보비 조머, 엘라 피플리츠정보드라마 | 오스트리아, 미국 | 106 분 | 2014-01-23 글쓴이 평점 우리는 누구나 한 점의 그림 속에서 살아간다 지루하고 흥미로운 영화였다. 그런데 지루하다는 것과 흥미롭다는 것이 양립 가능한 말인가.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특히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멈춰진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에 반해 생동하고 다이나믹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종종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들러보기는 하는 편이지만 특별히 애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체로 지루하다고 느낀다. 허나, 잠깐의 지루함을 견디고 나면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유명한 전시회에 가면 여러 작품을 보기보다는 ..
나의 상처를 인정하는 일의 어려움 2 동명의 제목으로 한 편의 글을 썼다. 비공개 글이다. 지난 십 여년 간 내 마음의 궤적을 정리해보았다. 흐릿하던 감정들이 조금은 선명해졌다. 며칠 전, 우연히 동료 교사와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사람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얘기를 꺼내게 되었다. 그러자 술에 취한 한 교사가 불현듯 나의 약점들을 지적하기 시작해, 나는 다소 불편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2차로 학교 교사들의 멘토격인 전 교장 선생님과 이사장님 댁에 들르게 되었다. 그곳에서 두 분에게 여러 좋은 말씀들을 많이 들었다. 이미 자각하기 시작했던 말들이 대부분이었으나 겸허하게 경청했다. 나보다 훨씬 더 오랜 생을 사셨고, 여러 문제에 깊이 고민해보셨을 두 어른은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