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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취미는 산책

멀고느린구름 2014. 3. 5. 09:02





취미는 산책 



취미는 산책이다. 예전에 누군가 취미를 물어오면 국민대답을 하곤 했다. 그러니까 독서라든가, 음악감상 같은 것. 대학생이 된 후로는 자의식이 강해져서 매우 용감하게 ‘노래방’이라고 응답하기도 했지만, 노래방을 취미로 삼는 청년에게 세상이 참 비정하다는 것을 몇 번 경험한 후 그만두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독서와 음악감상으로 돌아오고 말았는데, 왠지 그런 대답을 하고 난 뒤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워지곤 했다. 나의 이유 없는 발길질에 고통을 당한 돌멩이가 한 둘이 아니다. 돌멩이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한다. 


그렇게 나는 취미에 대한 의례적인 질문에 의례적으로 답하는 의례적인 인간이 되어, 아무렇게나 세상을 살아오고 있었다. 그러다 엊그제 홍대 골목길들을 여느 때처럼 하릴 없이 걷다가 문득 이 글의 제목이 떠오른 것이다. 취미는 산책. - 이와 같은 문장의 형식은 애청하는 팝 듀오 ‘가을방학’의 곡 제목에서 빌려왔다. - 그렇다. 내 취미는 ‘산책’이었다. 나는 왜 오랜 세월 ‘산책자’로 살아오면서도 내 취미가 ‘산책’인 것을 몰랐을까. 아아, 그것도 모른 채 이 사회가 그저 요구하는 대로 독서니 음악감상이니 하는 말들을 잘도 내뱉어오고 있었다니. 


내가 태생부터 우울했던 것은 아니다. 천성은 제법 밝은 편에 속한다.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유치원이나 국민학교 1~2학년 무렵의 코흘리개 시절에는 골목대장이라는 직함도 가지고 있었다. 1988년에서 1990년 사이의 서울은 집들이 워낙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마을마다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미로형 골목길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 미로를 탐험하는 일은 모든 동네 소년들의 로망이었고, 나는 그 선봉에 서곤 했었다. 아버지가 출근하고 나면 나도 곧 집을 나서서 동네 꼬마들과 목검을 들고 온종일 골목길을 탐험하다 해가 지면 귀가하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잦은 이사를 겪고, 밝은 천성이 후천적 우울감 속으로 침잠해가는 동안에도 나의 골목길 탐닉은 사라지지 않았고, 함께 탐험하던 동지들이 내 인생의 무대에서 하나 둘 사라지면서 결국 나 혼자 이리저리 동네를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비로소 나는 ‘산책자’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중학생 시절에는 솔직히 말해 떠오르는 친구가 단 한 명도 없다. 나는 언제나 혼자서 부산 사하구 감천동에서 신평동까지 거리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 버스로 스무 정거장쯤 된다. - 산책을 다니곤 했다. 차비가 모자랄 정도였으니 군것질을 할 사정은 당연히 안 됐다. 그냥 온종일 쫄쫄 굶으며 걷는 것 뿐이다. 그랬다. 노래방이라는 신 문명이 생기기 이전 내 취미는 분명 ‘산책’이었다. 물론, 노래방이 생겼다고 해서 산책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책보다 많이 읽은 것이, 거리의 간판들이었다. 음악보다 많이 들은 것이 길의 소리들이었다. 노래방에서 노래한 순간보다 보도블럭을 밟으며 흥얼거린 것이 몇 곱절의 시간은 더 될 것이다. 


산책은 내게 취미인 동시에 이제는 매우 중요한 의식 중 하나가 되었다. 산책을 하면 수많은 것들이 나를 찾아온다. 새로운 노래의 멜로디들이 말을 걸기도 하고, 의식 아래 가라앉아 있던 소설의 다음 장면들이 포르르 날아오르기도 한다. 엉켜 있던 마음의 끈들이 제자리를 잡고서 이렇게 하는 게 좋지 않아? 하며 미소 짓는다. 스토커처럼 따라붙던 지름신이 제 풀에 지쳐 나가 떨어지기도 한다. 산책이란 참으로 위대한 취미가 아닐 수 없다. 


어느날 권위 있는 문학상이라도 받게 된다면 그 영광을 ‘산책’에게 돌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취미는 산책이다. 어쩌면 여러분의 취미는 간단한 라면 끓이기이거나, AV 동영상을 장르 및 배우, 연대별로 모으는 일, 혹은 대열에서 이탈한 피규어를 0.1cm 옮겨 정위치시키는 고난도의 작업일 지도 모르겠다. 무엇이면 어떤가. 우리 모두 국민대답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답을 찾아보자. 무엇이 우리를 미소짓게 하는지, 무엇이 우리를 한 없이 고양시키는지. 내가 답하지 못하고 있던 취미의 정답은 내 삶을 정답에서 벗어나도록 만드는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2014. 3. 4.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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