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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멍 자국 같던 어둠이 옅어지더니 희미한 닭 울음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나는 강 줄기 저편에 눈을 뜨기 시작한 낮은 지붕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아침을 맞았다. 겨울의 아침은 늦고, 음악 소리는 낮다. 아주 오래된 음악들은 어디서 오는가. 100년 혹은, 400년 전의 음악들이 작은 방을 가득 채울 때면 머릿 속을 지나는 상념들도 어쩌면 지금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마저 든다. 음악은 그저 씨디플레이어 중심축의 회전 속에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지상을 떠난 음악가의 손끝에서 불멸의 재생을 거듭한다. 키보드를 치던 손과 타자기를 두드리던 손, 볼펜과 샤프, 만년필을 쥐던 손, 먹과 붓을 잡던 손을 떠올린다. 먼 옛날과 지금의 사이에 사라지지 않는 말들은 태어나, 우주의 의지를 채우고, 그것들 중의 어느 하나와 우리는 때때로 만나는 것이다. 인간은 어쩌면 이렇게 소리와 생각을 사랑하는 생물이 되었을까. 겨울을 위해 도토리를 채집하는 다람쥐처럼 인간은 영혼의 겨울을 위해 소리와 생각을 채집해둔다. 겨울 아침, 나는 커다란 공동의 땅굴 속으로 깊게 들어가, 옛 사람들의 도토리를 손아귀 속에 굴려본다. 그때의 나는 나인가, 옛 사람인가. 우리는 모두 나를 지키기 위해 살아가지만, 나라는 것은 궁구할 수록 모든 것으로부터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이 없는 생은 공허하고, 사랑이 있는 생 또한 공허하니 그저 우리의 생이 공허할 뿐이다. 이 공허는 비어 있는 공허가 아니라, 가득 차 있는 공허여서 우리는 어리둥절하다 가야 할 길을 잃고, 길을 잃은 뒤에는 우리 자신도 잃고 만다. 그때, 다시 한 번 희미한 닭 울음 소리가 들리고, 먼동이 터오면 죽비에 맞은 듯이 오직 나만이 여기에 남아 있다. 식은 커피를 마시고, 새로 산 키보드의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턱을 괴고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순간의 목격자가 된다. 아주 오래 전, 가장 먼저 세상의 아침을 목격했을 호모사피엔스의 도토리를 손에 굴리며.
2021. 1. 27.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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