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소설/긴 소설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14

멀고느린구름 2012. 6. 28. 09:50




그남은 품 속에서 조그만 선물상자를 꺼내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단번에 반지라는 것을 알 수 있는 크기였다. 그녀는 주저하면서 힙겹게 상자를 받아들었다. 그녀의 얼굴로 갖가지 표정이 교차했다. 포장을 벗기자 벨벳으로 감싸인 반지 상자가 나왔다. 덮개를 열었다. 그녀는 어떤 결심을 한 듯 담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고마워... 껴볼까?”

“응. 내가 해줄게.”

“아냐, 내가 낄래.”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오른쪽 약지에 은빛 반지를 걸어넣었다. 어째서 오른쪽인가 하는 의문이 그남의 얼굴에 나타났다. 


“아직 네 맘을 받아들이기로 확정한 건 아니니까.”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그남의 마음을 읽어 말했다. 그남은 머리를 끄덕였다. 


“예쁘다... 고마워 정말.”

“잘 어울린다. 다음에는 다이아 반지로 해줄게.”

“언제쯤?”

“100년 뒤쯤일까?”

“하하, 뭐야 너도 참.”


그녀와 그남 사이로 묘하게 따스한 공기가 지났다. 상냥하지만 애달픈 공기였다. 그남은 언제까지나 그 공기에 기대어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한 발 더 나아가고 싶기도 했고, 걸어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나라는 사람은 무엇일까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뿌리를 들썩이게 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은 사람을 자신의 뿌리까지 내려가게 하는 일이었다. 때로 그것은 즐거운 경험이지만, 때로 그것은 비참한 숙제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꾸만 오른손 약지에 끼인 은반지를 만지작거려 보았다. 작고 가벼운 빛이 반짝반짝이며 마음에 크고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차갑고 위태로운 원들이 둥글게 마음의 가장자리까지 퍼져나가는 것이었다. 쓸쓸함을 견딜 수 없었다. 그남은 자신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닐까.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하얗고 가느다란 실이 영원한 평행선을 그리며 뻗어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남이 말했다. 


“군대에 있으면서, 아니 8년 전 여름 그곳에서 너와 헤어진 뒤로 줄곧 너만을 마음 속에서 되뇌어 왔어. 주문처럼 매일매일 말이야. 내 인생에서 너 이외의 답을 찾을 수가 없었어. 도망가지 말고 다시 한 번 정면으로 마주하자고 생각했던 거야. 작년 봄 휴가 때 너에게 연락하기 전 수백 번을 망설였어.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때의 결정이 나는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훌륭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어. 너와 이렇게 마주하고 있고, 너에게 이렇게 생일 선물을 건낼 수 있는 내 삶이 참 고맙고 멋지다고 생각해. 다시 만나줘서 고마워. 앞으로 어떻게 우리가 나아간다고 해도 이 순간을 함께 가질 수 있게 마음을 내어준 것은 영원히 고마워 할 거야. 네가 바라는 사랑과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이 여전히 다르고, 예전의 너가 말했듯이 어쩌면 우리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한 발 더 함께 걸어가고 싶은 거야. 여느 연인들처럼 그래서 상처입고, 서로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고 환상이 깨어지고 우리가  남루한 사이가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너와 함께 상처입고, 무너지고, 나 자신을 깨어보고 싶은 거야. 나는, 나는 말야... 그리고 나서도 여전히 너를 좋아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해. 내가 품어왔던 감정의 깊이를 믿어. 네가 나에게 있어 가장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믿어. 그것이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는 아무런 근거 없는 꿈이라고 해도 말이야. 두렵겠지만.. 마음에 무거운 추를 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로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야. 같이 가보자. 행복하게 해줄게.”


그녀는 그남의 고백을 담담히 들었다. 그남이 지닌 마음의 결을 정확히 그려낼 수는 없지만 그 깊이 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다만, 그때의 그녀에게 그 까마득한 깊이는 비현실적이고 불확실한 것으로 다가왔다. 인적 없는 숲 속의 텅빈 우물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상처 입고 싶지 않았다. 인위적인 노력을 더하고 싶지도 않았다. 고통은 충분했다. 어째서 사랑에서까지 고통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반짝이는 은반지의 빛이 시렸다. 그녀와 그남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의 플랫폼에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떠나는 전철에 몸을 실었다. 서로가 탄 전철이 10여년의 세월을 계속 달려 뉴질랜드의 한 교회당 앞에 도착할지는 전혀 알지 못한 채로. 그때까지 그녀와 그남은 서로 아무런 연락도 주고 받지 못했다. 그남은 멈추지 않는 전철 속에서 뫼비우스의 띠에 갇힌 것처럼 20대 시절의 꿈들을 계속 꾸어야 했다. 



2012. 6. 28. 멀고느린구름. 


* 14박 15일간의 학교 여행 관계로 14회를 쓰는 데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소설 > 긴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16  (0) 2012.07.01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15  (0) 2012.06.30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13  (0) 2012.06.10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12  (0) 2012.06.04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11  (0) 2012.06.03
Comments
최근에 올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