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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여름, 바다

멀고느린구름 2022. 10. 3. 09:31

'여름, 바다'라고 하면 사람들은 보통 “올해도 해운대에는 더위를 피하려는 피서객들이 몰려…” 같은 말로 시작되는 기사의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내게 '여름, 바다'라고 하면 역시 10여 년 전의 그 바다다. 스물, 스물하나 즈음이었고, 흠모하던 선배를 따라 수영부에 가입했지만 3개월이 지나도록 물 위로 떠오르지도 못하던 신세였다. 반면 선배는 국가대표 유망주로 지역 인터넷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던 실력자여서, 수영부원의 팔 할은 그의 신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영부원들은 새 학기의 종소리가 울려퍼짐과 동시에 각자 치열하게 몸만들기에 들어갔다. 동아리방의 간판은 분명 수영부였지만, 교내에 수영장을 마련해놓을 정도로 전도유망한 학교도 아니었고, 사실 다들 그리 수영에 진심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수영’이라는 깃발을 하나 꽂아놓고, 맥주나 마시고 다니는 아주 보통의 대학 동아리였다. 선배가 포함된 어떤 그룹이 정기적으로 한 달에 한 번 수영장을 간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 수영장이 어느 동네에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내 정보력은 형편없었다. 아무튼, 각자도생으로 실력을 쌓아 6월 말 - 7월 초 바다에 데뷔하는 것이 단 하나의 룰이었던 것이다. 

 

그해 여름, 나는 끝내 맥주병 상태로 바다를 향했다. 1미터 높이의 어린이풀에서 서너 번 격렬하게 팔다리를 휘저어봤지만, 누가 봐도 격렬하게 구조신호를 외치는 걸로 보일 뿐이었다. 수면 위로 떠오르지도 못할 줄 알았다면, 수영장 정기권보다 역시 헬스장 정기권을 끊는 편이 나았을 거였다. 그리고 분명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수영부원은 그쪽을 택한 것처럼 보였다. 신입생 환영회 때 몇 차례 눈인사를 나눈 다음 홀연히 사라졌던 이들이 어디선가 다들 다부진 몸을 구입해서 등장한 것이다. 바다로 향하는 고속버스는 바깥의 여름보다 더 뜨겁게 흥이 올랐지만, 나는 두 칸 앞자리에 있는 선배의 머리카락만 이따금 훔쳐볼 뿐, 아무 의욕이 나지 않았다. 

 

색색의 비키니와 윤곽이 잡히기 시작한 식스팩들이 여름의 춤을 추는 동안, 나는 혼자 결연히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바닷속에 워터프루프책을 담갔다가 빼보고 있었다. 다들 목표하는 상대가 분명했기 때문에, 낙오된 동료 같은 것은 전혀 시야에 잡힐 턱이 없었다. 덕분에 나는 그해 6월 30일 경포대 해변에서 가장 마음이 평화로운 1인이 될 수 있었다. 싯다르타라든가, 노자라든가 하는 분들에게는 분명 주목받을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일찍 요절한 분들이었다. 3,000년쯤 살아계셨더라면 인류와 나를 위해 얼마나 좋았겠는가. 나는 아무렇게나 버려진 부원들의 짐짝들을 지키며 무지개 파라솔 아래서 하루 종일 해먹을 독차지했다. “넌 왜 물에 안 들어오냐?”는 질문을 열 번 정도 들었지만 당연히 누구도 진심으로 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질문자도 대답하는 나도 서로의 이름을 정확히 알지 못했으니까. 

 

하루 만에 커플링은 90% 확정되었다. 여름의 밤바다는 바로 그들의 것이었다. 한낮의 파라솔처럼, 밤의 숙소 또한 거의 나의 것이 되었다. 나는 텅 빈 숙소에서 드라이기로 젖은 책을 말리고 있었다. 방수라고 하더니 성능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처음에는 소음에 묻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희미한 노크 소리가 집요하게 반복되어 나는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아, 너였구나. 누가 나처럼 혼자 있나 했네.” 선배였다. 선배의 손에는 작은 물방울들이 송글송글 맺힌 맥주 두 캔이 들려져 있었다. 선배는 미소를 지으며 왼손에 든 맥주캔을 흔들어보였다. 나는 힘껏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만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이었다. 

 

선배와 나는 숙소 옥상에 놓인 평상에 앉아 맥주 캔을 부딪쳤다. 연인들의 웃음소리가 동쪽과 서쪽에서 쉼 없이 들려왔다. 밤의 수평선은 방금 닦아낸 것처럼 선명했고, 부서지는 파도소리는 열아홉처럼 청량했다. 할 말이 없어 이따금 올려다본 캄캄한 하늘에는 별들의 이야기가 가득했다. 천국의 여름이 있다면 이와 같지 않을까 싶었다. 1미터 거리도 되지 않는 곳에 선배가 있었고, 바람이 불면 그 향기가 훅 끼쳐왔기 때문이다. 

 

“졸업하고 뭘 하면 좋을지 모르겠네.”

“뭘 해도 좋지 않나요? 이제 여름이 시작됐을 뿐인데.”

“너, 국문과였니?”

“정외관데요.”

“정외과?”

“정치외교학과요.”

“아, 정말?”

“정말입니다.”

 

그때 선배의 질문이 혹시 나를 좋아하니? 였다면 모든 것이 뒤바뀌었을까. 나는 이따금 아무 의미도 없었던 그때의 짧은 대화를 떠올린다. 커플로 밤바다에 뛰어들었던 일부는 남이 되어 숙소로 돌아왔고, 몇몇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선배는 다음 날 아침, 취업 면접이 있다며 바다를 떠났고, 나는 2박 3일 일정의 남은 이틀 동안 더 바다에 머물렀지만 뒷날의 일들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청춘의 주인이 청춘 자신일 수 있다면 나는 그때 잊혀지지 않을 천국의 고백을 했거나, 선배의 뒤를 밟아 바다를 떠나는 버스의 옆좌석에 앉았으리라. 그러나 청춘의 주인은 언제나 청춘이 아닌, 운명이었다. 내게는 삶의 이쪽과 저쪽을 견줄 수 있는 시야도, 도도히 흐르는 시간의 강물을 멈출 타임워치 같은 것도 없었다. 누군가 따귀를 때리면, 그래도 한쪽은 안 맞았군 하며 안도하는 것이 최선인 시절이었다. 

 

지금이라고 대단한 통찰력이나 로스트 테크놀로지 같은 걸 지니게 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신과 내기를 해서 수억 분의 확률로 이긴 다음, 시간의 시침을 마음껏 돌릴 수 있게 된다면 한 번쯤 그 여름, 바다의 옥상 미션에 도전해보고 싶다. 

 

“정말입니다. 정말인 것은 그것뿐이 아니죠. 사실 제가 선배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도 정말입니다.”

“알고 있었어.”

“정말요?”

“정말이야.”

 

그리고 여름, 바다는 다시 쓰여지는 것이다. 

 

 

2021. 7. 3.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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