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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어떤 빛의 하루

멀고느린구름 2022. 11. 8. 16:09

 

그날은 모든 것이 선명했습니다. 거리와 하늘빛 그 모든 해상도가 전에 없이 높았습니다. 당신은 모든 먼지가 우주로 쓸려나간 것 같다고 했습니다. 가을옷과 겨울옷을 섞어 입은 사람들이 하나둘 오후의 거리를 거닐었고, 새파란 하늘은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았습니다. 우리는 까치발로 힘껏 손을 뻗어 파랑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고, 해사하게 웃었습니다. 우리는 긴 슬픔을 지나온 사람들임을 잊었고, 우리에게 닥칠 절망도 그날에는 몰랐습니다. 갈색 가죽구두와 검정 애나멜구두에 채이는 햇살들은 작은 강아지들의 털을 뭉쳐 만든 공 같았습니다. 아주 먼 우주 저 편에서 태양이 보내온 말들은 소리 없는 음악이었고, 이따금 우리를 어루만지는 청량한 바람은 사랑의 고백이었던 날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다시 올 수 없을 위대한 하루를 보내고 있음을 몰랐습니다. 나는 그날 당신의 머리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당신은 제가 새로 산 빈티지 옷이 너무 노인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불만은 오직 그것이었습니다. 당신과 나는 산업화 시기의 오래된 건물들이 남아 있는 번화가를 걸었고, 중세 유럽을 연상케 하는 식당에서 파스타를 먹고, 레모네이드를 한 잔씩 마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장 골목을 지나며 노점 떡볶이 1인분을 나눠 먹는 것으로 K데이트를 완성했습니다.

 

우리는 걷고, 또 걸었습니다. 자주 보던 것들도 그날의 해상도로 보면 달랐습니다. 당신은 옥상 위에 거대한 수목원을 가꾸고 있는 집을 발견했고, 나는 차례로 길을 건너는 아기 고양이 다섯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햇볕이 쏟아지는 거리에 서서 아기 고양이들의 숫자를 셌습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리고 이유없이 키스를 했습니다. 우리들 속에서 무한의 시간들이 부서뜨릴 것처럼 격렬하게 서로를 껴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인생을 돌아보면 그 순간의 몇 초가 다른 몇 년들보다 더 커다란 조각으로 남아 있습니다. 혼자 소파에 기대어 과거를 반추하면 그래서 늘 그 고양이 키스의 순간을 통과해야 합니다.

 

사무치게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단 한 번입니다. 어떤 아름다움들은 오직 시간이 만드는 것이기에, 우리는 마주한 순간의 빛을 영영 놓쳐버리곤 합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의 나처럼 어떤 빛의 하루를 가만히 종이 위에 그려보게 되는 것입니다. 후회하지 마십시오. 이 말은 참으로 소용 없는 말입니다. 오히려 거꾸로 뒤집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후회하십시오.

 

그날 아침, 우리는 다니던 직장에 그만두겠다는 문자를 보내고 거리로 나왔었습니다. 휴대폰을 꺼버리고, 지도도 없이, 목적도 없이, 오직 그날의 빛 속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다음 날 우리 모두 해고되었고, 몇 달 후 우리는 헤어졌습니다. 나는 몇 년 동안 제대로 된 직장을 다시 얻지 못해 하루하루 벼랑 끝에 서있어야 했습니다. 그날의 무모함이 내 인생을 망쳤다고 오랜 세월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더 많은 세월이 흐른 오늘에야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날의 선택은 내 생애 최고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날을 함께해준 아름다운 사람이여, 또 아름다운 날 속에 있기를.

 

2021. 11. 21. 멀고느린구름.

 

* 스텔라 장의 노래 '어떤 날들'을 듣고 영감을 받아 쓴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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