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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쓰나마나

멀고느린구름 2020. 6. 3. 08:58

쓰나마나한 글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나마나한 말도 좋아하지 않아서 타인에게 굳이 충고의 말 같은 것도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요즘 서점에서 내 판단으로는 하나마나한 말들이 가득한 책이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웹상에서 인기를 얻는 글도 대개 그런 유형의 글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형식이다. 

 

외롭다. 외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 나도 외로우니 너도 외롭겠지. 우리 모두 외로운 밤.

 

이기적인 사람들이 많다. 이기적이라는 것은 나를 위해 너는 희생되어도 좋다는 말이다. 위대한 시인 아무개는 이렇게 썼다.

"내가 죽어 네가 산다면 / 너는 살고 나도 영원에 살으리."

 

머릿속의 단상들을 아주 약간의 필터링만 거쳐서 문장으로 옮겨놓은 글들은 전후 맥락을 파악할 필요도 없고, 구구절절한 사연에 귀기울여야 할 필요도 없어서 내 머리를 비워놓기만 하면 아주 편하게 읽을 수 있다. (권위를 부여하고 싶으면 옛 거인들의 글을 빌려오면 그만이다.) 글을 읽는 일에까지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아마도 현대인의 바람일 것이다. 예능 프로그램에 언제부턴가 웃음 포인트를 짚어주는 자막이 필수가 된 것처럼, 글도 거두절미하고 간단한 본론을 열거하는 게 정석이 되어가고 있다. 그래가지곤 문학이 죽을 것이다! 라고 세기말의 비평가들이 광광 울었지만, 문학은 죽지 않았고 그저 권력을 내려놓고, 모습을 바꾼 채 유지되고 있다. 

 

이 공간에 내가 아무런 이미지를 달지 않고 대충 쓰고 있는 글들이 바로 나 스스로는 '쓰나마나'한 글로 분류하는 것들이다. 쓰고 있으면서도 이런 걸 뭐하러 내가 쓰고 있나 싶지만, 쓰는 행위 자체가 내 마음을 위로하는 효과가 있기에 쓰는 것뿐이다. 그럼, 일기장에 쓰면 되지 않느냐고 항변할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좁은 런닝머신 위에서 달리는 것과 탁 트인 강변 위를 달리는 것 사이의 기분 차이를 상상해보시기 바란다. 

 

정제된 글을 주로 올리는 브런치에 올릴 글을 요즘 거의 쓰고 있지 않아서 그냥 여기에 가득한 쓰나마나 장르의 글들을 올려볼까도 싶은데... 역시 별로 탐탁지 않다. 20대 초중반의 나는 가히 쓰나마나계의 대마왕이었는데... 시대는 늘 너무 늦게 내 앞에 도착하는 것만 같다.

 

어제는 공들여 만든 작품에 대해 "이런 걸로는 안 된다."는 혹평을 들었다. 여러 호평보다는 한 번의 혹평에 마음이 기우뚱하고 마는 것이 작가의 인지상정이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혹평가였을 테니... 업보로다. 내 글 중에서 힘을 빼고 쓴 글이 더 좋다는 독자들이 있다. 힘을 빼고 쓴 글에 대해 어떤 이는 저와 같은 평가를 하기에 글의 체중을 정하는 일은 영 쉽지가 않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다. 그래도 최근 공들여 쓴 글 한 편을 아주 좋게 보아준 사람이 있어 기쁘다. 오늘도 이렇게 삶의 일희일비 속에 쓰나마나한 글을 하나 더한다. 

 

 

2020. 6. 3.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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