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더니 우주 속에 홀로였다. 그리고 모든 것을 5분 정도밖에는 기억할 수 없었다. 앞은 물론 뒤로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만져지는 것조차 없었다. 아니, 어쩌면 ‘만지다’라는 언어 자체가 그곳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나머지 살려달라고 외쳤다.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소리가 전달되지 않았다. 공기의 입자들이 공간 속에 못처럼 박혀 있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무엇도 흘러가지 않고 흘러들지 않았다. 망연해진 나는 그만 자리에 주저 앉아버렸다. 내가 앉은 곳이 바닥인지 허공인지 정확하지 않았다. 혹은 내가 정말 앉은 것인지 혹은 그대로 서 있는 것인지, 아니면 누워버린 것인지조차 정확하지 않았다. 어차피..
5 결국, 사람과 사람은 서로를 어떻게 이해하게 되는 것일까. 사람에게는 ‘말’이라는 도구가 주어졌지만 ‘말’로 인해 사람들은 서로를 오해했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믿는다. 믿지 않는다. 사실이다. 거짓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가는 공기의 진동에는 물리학적 실체로서의 ‘정보'가 담겨 있지 않다. 정보는 오직 빛 -혹은 입자-를 통해서만 타자에게 전달된다. 포유류를 비롯한 짐승들은 위급한 순간 사용하는 단순한 몇 개의 음성신호를 제외하고는 모두 ‘빛'을 통해서만 정보를 전달한다. 인지과학자들은 이것에 ‘변연계 공명'이라는 까다로운 말을 붙여 사람들의 이해를 차단했다. 다시 표현하자면 변연계 공명이란 직감을 통한 전달이다. 뇌와 뇌, 눈빛과 눈빛, 마음과 마음 사이의 순간적인 대화이다. 아버지와..
4 아버지가 갑자기 응급 수술실로 들어갔다고 담당 간호사에게 연락 받은 것은 새벽 세 시경이었다. 나는 다음날 발표할 프리젠테이션의 키워드 색깔을 파란색으로 할지 초록색으로 할지 고민 중이었다. 파란색으로 하자니 검은색의 배경에 잘 어울리지 않았고, 초록색으로 하자니 계절과 맞지 않았다. 결국 이것도 저것도 아닌 노란색으로 키워드를 색칠하고 대충 옷을 껴입었다. 집밖으로 나서니 서늘한 북풍이 뺨을 세차게 때렸다. 어느덧 10월이었다. 늦여름의 기운도 사그라들고 있었다. 차를 몰아 급히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1시간이 지나버린 4시 23분이었다. 그 사이 아버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고 있는 사실이 없었다. YTN은 정작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았다. 새벽에도 여전히 전세 대란..
3 아버지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의사는 해볼 것은 다 해보았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물론 그 준비운동의 비법은 공개하지 않았다. 언제나 인생의 핵심 비법은 비공개 영역이었다. 스스로 터득하는 수밖에 없었으며, 스스로 터득한 것을 비법이라고 믿는 수밖에 없었다. 갈라보기 전의 수박처럼 인생은 망막했으며, 근원적으로 피로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고, 시선은 창밖의 새를 좇았다. “새를 한 마리 사줄까요? 하얗고 작은 새로 말이에요. 그런 새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다음에 올 땐 스위트피 화분도 하나 가져다 줄게요. 책은 읽을 수 있어요? 황석영이 새 소설을 썼어요. 아, 황석영 좋아하던가. 이문열 쪽이 나으려나요? 얼마 전에 박완서 선생이 돌아가셨어요. 박경리 씨 돌아..
2 젊을 때의 아버지는 좀 더 혈기왕성한 사람이었다. 전태일의 죽음에 분개하고, 광주학살에 눈물을 흘렸다.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에 나서는 일이 많았다. 낭만적 세계의 건설을 위해서였다. 독재자는 사라졌고, 노동법은 준수되기 시작했다. 함께 싸웠던 몇몇은 민주화 투사의 훈장을 달고 정치인이 되었다. 아버지는 다만 원래의 장소로 돌아왔다. 곁에는 젊은 투사와 사랑에 빠진 소녀가 있었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일하던 공장의 경리였다. 모두가 그녀를 사랑했지만, 성공한 것은 아버지였다. 내가 태어났고 80년대는 사랑보다 빠르게 사라져 갔다. 현상에서 현실적인 요소들을 제거할 때만 ‘낭만성'은 획득되었다. ‘낭만성'이라는 꽃은 상상력이 허락되는 백지의 정원에서만 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낭만적이었으..
아버지와 킹콩 1 아버지와 킹콩을 보러 갔던 적이 있었다. 정말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억이 남아 있다. 어째서였을까. 아버지는 다정하게 자식의 손을 잡고 영화관따위를 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 보았던 커다란 영화관의 스크린, 흑과 백으로만 구성된 영화, 조악한 킹콩, 그리고 영화에 진지하게 몰두하며 긴장하고, 웃고, 울기도 하던 아버지의 표정. 어른이 되어 다시 킹콩을 찾아보았다. 그때의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던 세월만을 살아왔다. 아주 가끔씩 이해해보려한 적은 있었다. 그때마다 ‘역시 이해 못해.’라는 결론만을 얻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낭비할 시간은 없는 시대였다. 1492년 10월 12일, 콜롬부스가 아메..
작년 9월 29일부터 시작되어 약 9개월 가량 연재를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고교시절에 썼다가 잃어버린 장편소설 이후 두 번째 장편소설이었습니다. 공식적으로 남아 있는 장편소설로는 첫 번째가 되겠네요. 뭐랄까 소설을 쓰며 마음에 맺혀 있던 개인적인 응어리를 조금은 풀 수 있었고 홀가분해졌습니다. 함께 읽어주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이 소설을 쓸 수 있도록 원동력을 제공해준 세 친구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먼저, 정식으로 연애소설을 한 편 써보라고 권유해 주어서 이 소설을 쓰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준 두헌군, 그리고 첫 회 연재에 첫 댓글을 달아서 격려해준 민철군,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자네의 첫 댓글이 가장 큰 격려가 되었다네^^) 마지막으로 항상 제 글에 따뜻하게 관심을 ..
파리씨, 생명주의자를 만나다 알베르토씨는 지금 막 [지구생명국제심포지엄]에 참가하고 오는 길이다. 알베르토씨는 심포지엄에서 라는 주제발표를 했다. 평소 동양철학에 조예가 깊던 알베르토씨는 노자의 자연주의 철학과 양자역학을 바탕으로, 서구유럽의 휴머니즘을 극복하는 방안을 연구 중이었다. 알베르토씨는 결국 노자를 바탕으로 독특한 물철학, 이른바 워터필로소피의 기초를 마련했다. 워터필로소피의 요점은 모든 생명체에는 물이 깃들어 있으며, 물을 함유하고 있는 존재는 모두 인간과 동등한 생명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알베르토씨는 우주 역시 물로 파악한다. 그에 의하면 우주의 모든 별은 허공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라는 거대한 바다 속에 잠겨 있다는 것이다. 생명은 모두 물로부터 나와 물로 이루어지고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