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저녁으로 가는 방법 버스 구석 자리에 앉아 귤을 까서 입에 넣고 있을 때였다. 귤빛 노을이 부시게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세상의 모든 저녁으로 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노을의 조금은 긴 이야기 속에선 시큼한 맛이 났다. 입 안의 귤은 다소 쓸쓸해했다. 버스는 어느 정류장에서도 멈추지 않고 세상의 모든 저녁으로 달려갔다. 버스에 앉아 있으면 세상의 높고 차가운 소리만 들려온다. 낮고 따스한 소리는 단단한 유리창에 의해 검문 당한다. 쓸쓸해하는 귤에게 한 자락 위로가 될까하여 지나간 노래들을 흥얼거려 본다. 노래 속에서는 오래전 헤어진 연인이 웃고 있기도 하고, 저주하고 있기도 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사랑은 즐거운 것이었는지, 저주 받을 죄였는지, 양희은의 노래처럼 쓸쓸한 것이었는지..
‘그때가 아닌 지금…’ 이라고 생각되는 때가 있다. 가령 2년 전 헤어진 연인과 자주 드나들던 바에서 그 당시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듣게 된 지금과 같은 때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그날도 오늘과 같이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의 연주였다. “전생이 있다면 난 분명 러시아인이었을 거야.”라고 나는 무심코 내뱉었다. 나는 J와 12월의 마지막날, 흡사 모스크바의 거리와도 같았던 눈덮인 세종로를 거닌 후 보신각의 종소리를 듣고 홍대의 단골 바에서 새해를 맞이하고 있었다. “어째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을 듣고 있으면 내 몸 속의 어떤 피가, 아마 그건 투명한 하얀색일 거야. 아무튼 그 피가 보드카를 원하거든. 바로 지금처럼.” “하하. 뭐야. 단순히 알콜중독자의 변명 아냐.” “진심이야...
마피아 "그러니까 말야. 아까부터 선배의 눈동자가 굉장히 흔들리고 있거든. 대체 왜 그런 걸까. 나는 선배가 마피아가 틀림없다고 생각해." 날카로운 C가 말했다. 단호한 어조였다. 이제 막 게임을 참가한 사람이라면 '이런 끼어들자마자 끝나버렸군.'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지목을 당한 A선배는 말 주변이 없는 사람이었다. A선배는 담담하게 "나는 아니다."라고 교과서 2페이지를 펴는 학생처럼 답했다. 논리적이지 않은 것이 되려 신뢰감을 주었다. "맞아. 선배가 마피아라면 아까 98학번 D선배를 죽이지 않았겠지. 이제 마피아는 단 한 사람이고. 우리는 4명이나 남았으니까 말야." 남몰래 A선배를 좋아하고 있던 안경을 쓴 B의 말이었다. "일리가 있어. 잠깐! 아까 D선배를 죽일 때 손을 내리지 않은 게 단발..
잃어버린 사랑을 찾습니다 1.신애, 조금은 거짓? 신애는 161번 버스 안을 오늘도 서성였다. 그러나 무소득. 누군가 161번 버스 제일 뒷좌석에 그녀의 남편이 누워 있는 걸 보았다는 것이었다. 벌써 며칠 밤 전의 낡은 정보인데다가 남편은 버스를 탈 줄도 몰랐지만 신애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편이 허름한 스웨터와 조금 얇은 겨울바지만 입고 집을 나가서 실종 된지 벌써 네 달이 넘어가고 있건만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정. 깊은 밤에 잠긴 도시에는 창백한 나트륨등만이 주저리주저리 허공에 걸려 있었다. 신애는 자옥한 어둠이 깔린 거리 위를 마냥 발밤발밤 걸었다. 그녀의 남편이 그 어둠 어느 편에 절지동물마냥 몸을 돌돌 만 채 잠들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거리..
序文 프랑스 인권선언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인간은 권리에 있어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 생존한다. 사회적 차별은 공동이익을 근거로 해서만 있을 수 있다.”우리사회에는 우리가 인식 못하는 그늘진 곳에서 넉넉한 다수의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일방적으로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릴 적 저는 달동네에서 살았습니다. 언젠가 TV에서 그런 달동네의 집들이 강제로 깡그리 헐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은 그 이후 3년간 천막에서 살았고, 이제는 소식이 끊겨 어떻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공공의 이익을 위하는 일이라지만 한 개인의 삶을, 한 가족의 평화를 그렇게 무참히 깨뜨려도 되는 것일까요? 이런 의문에서 저는 부족한 솜씨나마 이 글을 씁니다. 타인의 세상 흔적 그날 따라 날이 유..
우리가 세계지도를 샀을 때 인간의 뇌에는 변연계라고 하는 것이 있다. 원시뇌인 파충류의 뇌가 짝짓기, 먹기, 잠자기 등 본능을 담당한다면 변연계는 인간의 직관과 감정을 관장한다. 이 변연계는 인간의 몸에서 세계로 뻗어나가 있는 투명한 안테나라고 보면 이해가 쉽다. 인간의 감정과 생각은 1초에도 빛의 속도로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다닌다. 수억 명의 감정과 생각을 우리는 변연계라는 안테나로 늘 수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모르는 순간에도. 내가 세계지도를 샀을 때 그녀 역시 세계지도를 산 일을 무어라 불러야 좋을까. 쉽게 말하자면 운명, 인연, 기적 따위의 두 음절 단어들을 떠올릴 수 있겠다. 조금 복잡하게 사건을 이해하자면 그 순간 나의 변연계와 그녀의 변연계가 ‘세계지도를 방에 걸어야겠어!’라는 ..
- 앨버트 독 - 저녁 7시가 넘으면 불빛은 이곳 리버풀 항에만 남아. 여기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은 7시면 모두 집으로 돌아와 거실 한 군데만 희만 불빛을 켜두고 각자의 하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나는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시간이면 불나방처럼 빛을 좇아 리버풀항으로 가. 떠나는 사람과 돌아올 사람들을 위한 공간. 아주 오래전 아프리카에서 온 검은 사람들은 이 항구에서 영국 각지로 노예가 되어 팔려갔다지. 수백년 전의 그들의 얼굴이 아직 이 항구에 남아 있어. 그곳에 서서 검은 바다를 보면 어쩐지 단 한 번 만난 적도 없는 그네들의 얼굴이 떠오르거든. 어쩌면 내 피 속에 나도 모르게 아프리카가 스며들었는지도 몰라. 이곳에서는 기상을 점치는 내기를 할 수 없겠어. 365일 중에 300일 이..
- 여자친구의 여자친구 - 내일은 개학일이다. 얼마전까지 머리 위에서 끝없이 빗방울을 떨구던 구름들이 이제는 아득히 멀리서 떠다니고 있다. 카페오레를 절반쯤 마시고 보니 컵의 벽면을 따라 지저분한 자국이 남는다. 여자친구가 오기로 한 시간이 34분 지나있다. 아니, 아직 28분이다. 커다란 유리창 밖에서 가게들의 불이 켜진다. 더러는 이미 켜져 있거나 혹은 오히려 꺼지고 있다. 무심하거나 유심히 그 모습을 바라본다. 휴대폰 불이 켜진다. 진동 모드 혹은 매너 모드일 것이다. 혹은 둘 다일지도 모른다. ‘미안, 조금 늦었네. 지금 모퉁이야. 신호등만 바뀌면 바로 갈게.’ 모퉁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아니 조금은 신경 쓰인다. 비틀즈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 떠오른다. 비틀즈의 마지막 앨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