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를 부탁해 “애 과외비가 얼만지나 알아! 집안 살림을 좀 하든지! 나가서 일을 찾아보든지!! 이제 아주 지긋지긋해!!!” 지긋지긋한 건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의 아빠는 담배를 챙겨 밖으로 나가버렸다. 다시 라이터를 가지러 들어온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아이에게 “아빠 라이터 못 봤냐?”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이의 아빠는 다시 나갔다. 아이의 엄마는 그 하는 양을 사납게 지켜본다. 아이에게도 아이가 사는 집에게도 이제는 익숙한 풍경. 아이의 아빠가 실직을 한 것은 1년 전이었다. 지금은 보험회사를 다니는 아이의 엄마가 벌어오는 돈으로만 세 식구가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초등학교 방학이 되어 엄마가 출근을 하면 아이는 집에 혼자 남았다. 아빠는 엄마가 출근한 뒤에 곧바로 나가서는 저녁 늦..
4페이지 분량의 마지막 자기소개서 오늘 나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마지막 자소서를 쓰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이 결정은 매우 심대한 실존적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상당히 사소한 사건을 계기로 한 것이다. ‘사건'이라고 이름을 붙이니 뭔가 또 거대해지는데, 아서 코난도일이나 애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에 나올 법한 그런 기묘한 ‘사건'은 물론 아니다. 굳이 그쪽으로 대자면 탐정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문을 열고 집을 나선 순간 그 바로 앞에서 범인이 사건에 대한 상세한 포트폴리오를 작성해 기다리고 있다가, 탐정에게 건내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는 식의 그런 사건이다. -성향에 따라 이 비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 오전에 의류 판매를 하는 A기업의 공채 면접장에 가서 나..
11. 진보와 진화 4 진 : 먼저 기회를 주시니 얘기하지요. 인간 자신의 변화. 뭐 생물학적 변화이든, 정신적 변화이든 그것을 ‘진화'라고 전제합시다. 그리고 사회 제도의 변화 여기서 제도의 변화란 반드시 사회적 약자, 소수자, 그리고 노동자-민중 계급의 이익을 도모하는 제도적 변화를 말합니다. 그러한 사회 제도의 변화를 ‘진보’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사회자께서 하신 질문은 다음과 같지요. 진화가 먼저냐, 진보가 먼저냐. 진화를 이야기하는 쪽에서는 항상 러시아 혁명을 근거로 삼습니다. 붉은 혁명으로 유럽의 절반이 공산화 되었고 마르크스주의의 깃발을 높이 들었지만 한 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깃발을 내리지 않았느냐. 그 원인은 복합적이겠지만 그 핵심에는 결국 ‘인간'이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진화'를 말..
10. 진보와 진화 3 압 : 음..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나 : 물론입니다. 압 : 우선, 미스터 고. 그대의 경제 활동이 내가 하는 운동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합니다. 그러나 경제라는 것에 대해 제 소견을 잠깐 말씀 드려도 좋겠습니까? 고 : 뭐 하시던가. 압 : 감사합니다. 미스터 고. 당신은 무엇을 위해서 삽니까? 고 : 엥? 압 : 중요한 질문입니다. 대답해주세요. 고 : 그딴 게 뭐 별 게 있나요. 그저 잘 먹고 잘 살려고 그러는 거지 다아. 압 : 정말 훌륭한 답이셨습니다. 오 프리덤. 고 : 엥? 압 : 모든 존재는 잘 먹고 잘 살려고 합니다. 그것이 생물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하지만 경제란 무엇입니까. 물론 경제란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하나의 방편..
9. 진보와 진화 2 나 : 자, 그럼 본격적인 토론을 시작하겠는데요. 가장 먼저 짚어봐야 할 것이 바로 이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양말 벗기 무브먼트. 아주 전 세계적인 영성 운동인데요. 국민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양말 벗기 무브먼트가 우리네 삶을 나아지게 했을까요. 아니면 그대로일까요. 혹, 퇴보했을까요? 여기에 대한 각 패널 분들의 생각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요번에는 시간 제한은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특별한 규칙도 없습니다. 심지어 상대방에게 욕을 해도 좋습니다. 아주 파격적이지요? 단, 토론이 더 이상 진행이 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라고 판단 될 때에만 제가 개입하겠습니다. 음.. 그럼 먼저 우리 최 박사님께서 먼저 말씀 해주실까요. 최 : 네, 성하의 2328번째 공식제자..
우주 어딘가에 또 한 마리의 토끼가 틀림 없어. 우주 어딘가에 또 한 마리의 토끼가 분명히 있을 거야.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서려 있다.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힘을 주어 말을 이어갔다. 물질을 구성하는 모든 입자에는 반입자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라는 말 알지. 내가 어떤 것에 힘을 가하면 그에 반하는 힘이 작용하는 거야. 모든 생명체는 우주로 보자면 어떤 힘이 작용한 결과야. 그렇다면 그에 대한 동일한 반작용의 힘이 가해지기 마련이고, 그로 인해 반입자는 탄생하는 거야. 그것이 이 광대한 우주, 그러니까 칼 세이건이 빌리언 오브 빌리언이라고 표현한 끝없는 시공의 어딘가에 반드시 있는 거야. 여기 서 있는 너와 나도 우주 저 편에 또 하나가 존재하는 거지. 아니, 하나가 ..
8. 진보와 진화 1 나 : 안녕하십니까, 국민 여러분. 오늘 사회를 맡게 된 칼럼리스트 장범기입니다. 반갑습니다. 오늘 모두 아시다시피 아주 특별한 대담회가 마련되었습니다. 우리 국민 중 모르는 사람이 아마 없을 겁니다. 국민 여러분 세계적인 랍비 압둘 아자르 씨입니다. 큰 박수로 환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압둘 아자르(이하 ‘압') : 오, 프리덤. 나 : 네, 감사합니다. 자, 오늘 바로 세계적인 영성 지도자인 압둘 아자르 씨를 모시고 여러 국민들이 보시는 자리에서 생중계로 심도 깊은 대담회를 나눠보겠습니다. 감히 말씀 드리자면 오늘 이 대담회는 단순히 우리 대한민국의 범주를 떠나서 아마도 우리 전 세계 인류사 전체에 아주 기념비적인 이벤트가 되지 않을까 감히 예상해봅니다. 오늘 대담회는 ‘양말 ..
어느 날 두 개의 벤치가 어느 날 하나의 벤치가 또 하나의 벤치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또 하나의 벤치는 깜짝 놀라 대답조차 못했다. 옆에 있는 벤치가 자기에게 말을 걸어온 것이 정확히 93년만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저기... 미안하지만 잠자고 있지 않으면 대답해줄 수 있을까?" 또 하나의 벤치가 자는 척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잠을 자기에는 하늘이 지나치게 파랬고 바람은 겨울의 숨 소리처럼 높고 서늘했다. 또 하나의 벤치는 별 수 없이 오래 묵은 자신의 목소리를 꺼냈다. "무슨 일이니?" "역시 깨어 있었구나. 분명히 93년만이지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게?" "응" "난 갑자기 그런 의문이 들었어. 93년 전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렇게 서로 이야기하지 않고 지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