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트위스트 문자 메시지를 열어보니 이번에도 서류모집에서 탈락이었다. 분명 작년 가을에 40번째 입사 서류를 작성했다. 지금은 1월이고 그동안 꾸준히 자소서따위를 작성해 왔다. 어느 순간부터 횟수를 헤아리지 않게 되었다. 수 천명에 달하는 응모생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거는 수고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회사측의 입장도 이해한다. 그럼에도 기분이 나쁜 것만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기계적으로 자기소개서를 쓰고, 입사원서의 빈칸을 채워나가게 되었다. 적어도 10번째까지는 이렇지 않았다. 물론 5번째나 6번째부터였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 아, 혹자에게는 무척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 내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면 65번째를 채우는 일이었다. 그런 극단적인 목표를 ..
4(완결) 갈게, 나는 웅크리고 앉은 K를 등지고 파란 문으로 걷는다. K는 엷게 흐느낀다. 우스운 눈물이다. K는 어차피 나를 안지도 않을 것이면서, 나를 잃을 것을 염려한다. 내가 갖기는 싫고, 남주기는 또 아깝다는 그런 흔해빠진 마음이다. 나는 K에게 그 정도일 뿐이다. 소유욕의 강도에 따라 존재의 가치를 평가 당하는 그런 정도의 사람이다. 고개를 돌린다. K는 그대로다. 화가 난다. 그에게 욕을 퍼붓고 싶다. 그러기에 이곳은 적절한 장소가 아니다. 달의 뒷편에서 누군가에게 욕을 퍼부은 기억을 간직하고 사는 인생은 얼마나 초라하겠는가. 잠깐, 나는 더 살아가는 것일까. 저 문 뒤에서 더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K의 염려대로 나의 생은 여기서 끝이 나는 걸까. 나는 Y를 사랑했었다. 오랜 열..
3 K의 표정은 월드컵 결승전 후반 마지막 1분, 1대 1 상황에서 자살골을 넣은 에이스 스트라이커 같다. 절망과 공포. 뭐라고? K의 반문. 가지 않겠다고, 나의 응답. 다시 뭐라고? K. 안 가! 나. 조금 전까지 카렌 카펜터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흐르던 까페가 아니다. 음악은 멎고, 테이블도 커피도 모두 사라지고 없다. 곳곳에 잿빛 크레이터가 드러나보이는 달의 표면 위다. K와 나, 그리고 Y가 있다. 미쳤어? K의 말이 거칠어진다. 나는 대답하지 않는 대신 Y에게 ‘미안해'라고 사과한다. 지금 뭐하는 거야?! K의 목소리는 내 심장을 찢을 듯 솟구쳐 온다. 머리가 어지럽다. 두 사람이 먼저 얘기를 해야할 것 같네, 난 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Y는 텅빈 공간에 우뚝 서 있는 파란 문을 가리킨..
2 그래서 말인데, K의 목소리가 진지하다. 응.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우리 서로 정리해야할 것들을 정리하자구, K는 정해진 대본을 읊듯이 말한다. 분명 몇 번이고 되뇌어본 말일 것이라 여기니 피식 웃음이 난다. 너도 참 이럴 때 웃음이 나와? 그래도 우리 사귄 게 자그마치 7년이었다고, K는 당황한 표정이다. 응, 그 7년이 이렇게 기묘한 곳에서 끝이 난다니 웃음이 나오네. 라고 얼버무리고 만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정리한다는 말일까. 7년의 세월을, 그 속에 깃든 갖가지 사연들을, 함께 갔던 장소와 함께 듣던 노래, 그동안 우리가 먹었던 음식의 품목들을 어떤 식으로 정리할 수 있다는 말일까. 사람은 컴퓨터가 아니다. 포맷이 불가능하다. 바탕화면에 있던 것을 폴더의 폴더, 그 폴더의 폴더 속쯤으..
달에서 1 우리가 와 있는 곳은 달의 뒷편으로 추정된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다. 처음 그 자리 그대로였다. 우리는 분명히 대학로 뒷편의 낙산공원 벤치에 앉아 개기월식을 보고 있었다. 11년마다 찾아온다는 개기월식이었다. 우리가 만난 지는 꼭 7년이었다. 지구의 그림자가 달을 완전히 덮어버렸을 때였다. 눈 앞이 캄캄해졌다. 다시 모든 것이 선명해졌을 때는 이곳이었다. 장소가 뒤바뀐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K는 감청색 스웨터에 검은 코트를 걸치고 붉은 털실로 짠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등에는 항상 짊어지고 다니던 통기타 가방 - 그는 그것을 악기를 담는 용도보다는 정말 가방처럼 이용했다. - 이 메어져 있다. 나 역시 늘 입고 다니던 붉은 빛 겨울 코트차림이었다. 한 손에는 애용하던..
진보와 진화 7 진 :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나 : 네, 진 선생님 말씀하십쇼. 진 : 진보란 뭐냐. 진보가 꿈꾸는 세상은 뭐냐. 간단하게 말씀 드리자면 이런 겁니다. 진보란 한 발짝 더 나아가자는 겁니다. 진보적인 세상이란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란 겁니다.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을 성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합니다. 다소간 부정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합니다. 의문을 가져야 하고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쓰고, 레닌이 공산주의의 깃발을 올렸을 때의 진보는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와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의 폐단을 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유재산제도에 의한 부의 편중현상을 해결하자는 것이 진보였습니다. 그래서 함께 나누는 세상, ..
진보와 진화 6 나 : 네 여러분 그럼 다시 이어서 세기의 토크쇼 ‘진보와 진화' 계속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고 대표님께서 압둘 아자르 성하에게 ‘양말 벗기 무브먼트'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사람을 구원한다고 하는 데 대체 그 주체가 되는 ‘사람'이 누구인가? 그 ‘사람'에 노동자는 포함이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라는 논지의 질문을 하셨고, 아자르 성하는 고 대표님의 자세를 지적하며 먼저 마음을 가라앉히고 얘기를 하자고 제안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고 대표님, 준비가 되셨습니까? 고 : 그거 뭐죠? 저기… 아. 그래. 오 프리더엄~ 나 : 하하 네. 준비가 되셨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럼 아자르 성하 말씀 하시겠습니까? 압 : 오 프리덤. 제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계기를 말씀드리는 것..
진보와 진화 5 고 : 진화고 진보고 나발이고, 일단 사람이 먹고 사는 게 중요한 거 아니에요. 사람이 굶어죽는데 그깟게 다 무슨 소용이야. 사회자님, 안 그래요? 나 : 하하. 네 뭐,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고 : 아니, 잘 모르겠다니? 잘 모르겠다뇨. 거 말이 됩니까? 이래서 요즘 젊은 사람들이랑은 대화가 안 돼. 당최 밥을 굶어 보기를 했어, 추위에 몸이 얼어보기를 했어, 비가 새는 걸 막아 본 적이 있어? 엉? 참 나.. 이러니 다들 세상이 미쳐가지고 무신 양말을 벗는다 어쩐다 자유가 뭐다 진보가 뭐다 지랄하고 자빠진 거지! 나 : 저, 고 대표님 말씀 중에 죄송한데 고 대표님과 저는 그렇게 나이 차이가 안 나는 것 같습니다. 고 : 엥? 사회자 양반이 몇 살인데? 나 : 마흔 다섯입니다. 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