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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어느날 두 개의 벤치가

멀고느린구름 2011. 10. 16. 15:04



어느 날 두 개의 벤치가

 

 

  어느 날 하나의 벤치가 또 하나의 벤치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또 하나의 벤치는 깜짝 놀라 대답조차 못했다. 옆에 있는 벤치가 자기에게 말을 걸어온 것이 정확히 93년만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저기... 미안하지만 잠자고 있지 않으면 대답해줄 수 있을까?"

 

또 하나의 벤치가 자는 척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잠을 자기에는 하늘이 지나치게 파랬고 바람은 겨울의 숨 소리처럼 높고 서늘했다. 또 하나의 벤치는 별 수 없이 오래 묵은 자신의 목소리를 꺼냈다.

 

"무슨 일이니?"

"역시 깨어 있었구나. 분명히 93년만이지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게?"

"응"

"난 갑자기 그런 의문이 들었어. 93년 전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렇게 서로 이야기하지 않고 지내는가 하고."

"그러게..."

"넌 기억나니?"

"글쎄... 정확히 떠오르지는 않지만 무언가 내가 썩 좋은 기분이 드는 일이 아니었지"

"그랬니? 나는 혹 내가 너에게 상처 입었던 걸까? 하고 생각 중이었는데."

 

  벤치와 또 하나의 벤치는 오래오래 생각에 잠겼다. 노을이 두 번 두 벤치에 머물다 갔고 달빛은 하루만 쉬다 떠났다. 두 번째 날에는 달이 뜨지 않았고 지구는 눈을 감은 것처럼 캄캄했다. 어둠 속에서 벤치가 침묵을 잘랐다. 

 

"그건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었을까."

 

또 하나의 벤치가 생각 속에서 깨어나 말을 받았다.

 

"아마 그렇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93년 동안이나 말을 하지 않을리가 없잖아. "

"음 그렇군..."

 

벤치는 수긍했다. 허나 그래도 미심쩍은 게 있어

 

"그런데 말야 93년 전의 우리는 어떤 사이였지?"

"친한 사이였거나 친하지 않은 사이였겠지."

"그랬겠지."

 

벤치는 잠시 겨울을 머금은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저기... 이런 질문이 혹시 당황스러울지도 모르겠는데... 너는 우리가 93년 전에 친한 사이였던 게 좋겠어, 아님 친하지 않은 사이였던 게 좋겠어?"

"친하지 않은 사이."

"왜?"

"친한 사이라면 친하지 않게 되는 일만 남았지만, 친하지 않은 사이였다면 친해지는 일만 남은 거잖아."

"맞아."

 

벤치는 왠지 흐뭇한 기분이 들어 미소를 지었다.

 

"왜 웃니?"

 

또 하나의 벤치가 조금 샐쭉하게 물었다.

 

"그냥"

 

  벤치는 번지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벤치는 이렇게 93년 동안 한 자리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며 지낸 두 사람이라면 필시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리라 생각했다. 그것을 93년만에야 깨닫게 된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한탄보다는 운명의 연인을 발견한 기쁨이 더욱 컸다. 벤치가 생각하기에는 아무리 큰 일이 있었다 한들 친한 사이였던 이들끼리 93년 동안 한 마디 말을 하지 않을 일은 없다. 그러니 두 벤치는 친하지 않은 사이였으리라. 그러나 또 하나의 벤치는 별로 웃음이 나지 않았다. 그런 의문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말야."

"응?"

 

벤치는 무방비 상태로 또 하나의 벤치의 말을 받았다. 또 하나의 벤치는 왠지 그런 벤치가 정겨우면서도 한심하게, 혹은 쓸쓸하게 여겨졌다.

 

"만약에 우리가 93년 전에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면 말야. 우리는 서로를 용서할 수 있을까?"

"용서?"

 

두 벤치는 동시에 무거운 겨울의 하늘을 느꼈다. 가슴 속에 새파랗고 시린 날을 들이대는 듯한 침묵이었다. 벤치는 또 하나의 벤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직감했지만 문장으로 선명하게 표현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또 하나의 벤치는 잔인한 친절함으로 벤치를 도왔다.

 

"생각해봐. 우리가 93년 전에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면... 그 후 93년간 서로를 이토록 방치한 것을 용서할 수 있느냔 말이야... 이 숲은 사람의 발길이 드문 숲이었어. 93년간의 외로움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었지."

"... ..."

 

또 하나의 벤치는 공포스런 말을 계속 늘어놓았다.

 

"그 외로움의 고통만이라면 또 괜찮아. 서로를 그렇게 기다려주었다는 낭만의 면죄부가 부여되잖아. 그런데 너도 나도 어땠니. 이 숲에 사람이 찾아와 너와 나 위에 쉬었다 갈 때마다 우린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했어.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진심이었어. 42년 전에 1년 간 나를 찾아왔던 그 사람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어. 그가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된 후 나는 그를 30년이나 더 기다렸었어. 진심으로. 아주 아주 간절한 진심으로 말이야. 너는 지난 93년 동안 단 한 번도 그런 사랑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겠니."

"말할 수 없어."

 

  두 벤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또 하나의 벤치가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가 삼켰다. 또 하나의 벤치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던 벤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미소가 바닥으로 떨어져 나갔다. 구름들이 움직이며 벤치 주변의 썩은 이파리들을 쓸어 갔다.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두 벤치는 마치 누군가 자신들의 상처를 긁는 것처럼 느꼈다.

 

"93년 전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면... 나는 너를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벤치가 또 하나의 벤치에게 토로하듯 외쳤다. 또 하나의 벤치는 담담하게 바닥을 굴러다니는 벤치의 미소를 내려다보았다. 또 하나의 벤치가 어렴풋이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93년 전에도 넌 똑같은 말을 했어."

 

  인적이 드문 숲의 두 벤치는 얼어붙은 강물처럼 말을 멈추었다. 숲에는 많은 눈이 내렸고 많은 것이 얼어붙었다. 구름들은 이제 거의 하늘로 나오지 않았고 오솔한 바람만이 텅 빈 하늘을 떠돌았다. 그로부터 다시 93년이 흘렀다.

 

 

 

 

 

 

 

 

2007. 12/18.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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