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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1

멀고느린구름 2012. 5. 12. 09:33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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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옹은 요양원 뒤쪽으로 난 기다란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을 걷고 있다. 오늘은 정신이 맑다. 장대비가 내린 뒤라 숲의 모든 생명들이 한껏 기지개를 켜며, 생의 냄새를 퍼뜨리고 있다. 노옹은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를 원없이 누리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오늘이 자기 삶의 마지막 하루이길 바랐다. 노옹에게는 가족이 없었다. 친인척도 없었으며, 입양한 자식도 있지 않았다. 그 모두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포플러나무 숲 사이를 혼자 거니는 것처럼 노옹은 인생의 길을 혼자 걸어왔다. 


치매에 걸리기 이전까지 그는 유명한 작가이자, 총명한 시대의 지식인이었다. 처음 요양원에 입원한 몇 년간은 대학생이며, 독자며, 지인이며 하는 이들이 드나들었다. 허나 정신이 나갔을 때 부리는 노옹의 고집과 어리광에 화들짝 놀라 발길을 돌리기를 몇 번. 이내 사람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그의 죽마고우나 되는 사람 둘만이 1년에 한 번 즈음 그의 생사를 확인하러 들를 따름이었다. 그 죽마고우 둘 중 하나는 몇 주 전에 세상을 등졌고, 나머지 하나는 엊그제 멀리 떨어진 다른 요양원에 입원했다. 노옹은 그 소식을 듣고는 몇 일 동안이나 외출을 하지 않고 하루 꼬박 창밖으로 지나는 하늘만 올려다보더니 오늘 문득 정신을 차린 것이었다. 평소라면 요양사가 아침을 먹이려고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꿈쩍도 하지 않던 이가 오늘은 제 스스로 눈을 뜨고 아침상까지 군말없이 챙겨 먹는 것 아닌가. 거기다가 요양사에게 


“그동안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눈을 감고서도 이 은혜는 잊지 않겠소.” 


라고 어리광을 전혀 부리지 않고 정말 그 나이 대의 어른처럼 말하는 것이었다. 요양사는 처음으로 노옹에게서 작가이자 지식인으로서의 풍모를 접하고 당황해하며 서둘러 노옹의 아침상을 들고 노옹의 방을 나갔다. 노옹은 요양사가 나간 뒤 머리 맡에 놓여 있던 책을 집어 들어 펼쳤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었다. 아무 쪽이나 펼쳐 읽어내려갔다.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그녀에게 말하며 두 손에 키스하였다. “제 모든 생애는 늘 길 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그녀가 어머니처럼 미소지었다. 

“결코 집으로 아주 돌아오지는 못하지만” 그녀가 다정하게 말했다. “친한 길들이 서로 만나는 곳, 거기서는 온 세계가 잠깐 고향처럼 보이지요.”-  


싱클레어가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부인과 재회하는 대목이었다. 노옹은 ‘제 모든 생애는 늘 길 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라는 글귀를 다시 한 번 힘주어 읽었다. 다음에는 소리내어 읽었다. 어쩐지 낯선 자신의 목소리가 가슴 속에서 맴을 돌았다. 노옹은 오른 손 약지에 걸린 은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자신이 <데미안>을 읽은 것이 몇 살 때였는지를 떠올리려 애썼다. 떠오르지 않았다. 갑자기 심장이 뛰었다. 단단한 돌무더기 사이를 뚫고 올라오는 연푸른 새싹같은 약동이었다. 창문을 활짝 열자 따스한 바람이 들어왔다. 노옹은 여기저기 실오라기가 비어져 나와있는 푸른하늘빛 스웨터를 걸치고 방을 나와 포플러나무 숲으로 걸었다. 


무언가를 숲에서 잃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숲길을 계속 서성이던 노옹은 조금 지친 표정으로 벤치에 앉는다. 먼저 앉아 있던 박새 한 마리가 놀라 포르르 날아오른다. 노옹은 박새가 날아간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 한 점 없이 시푸른 하늘이다. 노옹은 하늘빛이 너무도 고와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본다. 손에 색이라도 묻어나려는 듯이. 노옹은 빈 손을 펼쳐보이며 피식 웃고 만다. 윤동주의 ‘소년’이라는 시를 좋아했던 노옹이 학창시절 곧잘 하던 짓이었던 것이다. 노옹은 더 바랄 것 없다는 만족한 표정으로 자신이 걸어온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을 바라본다. 멀리서 노파 하나가 걸어오고 있다. 미풍에 나부끼는 깃털처럼 찬찬한 걸음이다. 간질한 실바람이 노파쪽으로부터 불어온다. 노옹은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바람이 멎은 듯했다.   





2012. 5. 12.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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