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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거위들 3

멀고느린구름 2015. 9. 16. 10:07


나는 등록금으로 프랑스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버렸다. 당연히 나는 프랑스어를 하지 못한다. 제2외국어 과목이 프랑스어이기는 했으나, 수능시험 과목에 포함되지 않는 것을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쳤을리 만무하지 않는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2학년 봄학기 제2외국어 집중 수업 기간이 있었다. 불과 한 학기만에 2년치 프랑스어 수업을 몰아서 진행하는 것이었다. 일주일에 무려 6시간이 할당되어 있었는데, 그나마도 3시간은 사실상 영어 자습 시간으로 활용되었다. 노회한 할아버지 프랑스어 교사는 교단에 서서 프랑스어 교과서를 낭송하고 퇴장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할아버지 교사는 불란서 유학까지 마친 불어의 대가였다. 그가 젊었을 때에는 프랑스어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했다. 지식인이라면 불어나 독어 중 하나는 구사할 수 있어야 하는 시대였다고 한다. 한자와 일본어는 기본이었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에는 자부심이 넘쳤다. 돌이켜보면 영어 자습을 하는 아이들 앞에서 프랑스어 교과서를 읽어내려가는 그의 표정과 자세는 꿋꿋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이제 곧 그의 골든에이지가 잠들어 있을 프랑스로 떠나게 되었다. 


인천공항 대합실에 앉아 몇 번이나 행선지를 살폈다. ‘파리’라고 쓰여 있는 도착지는 아직 어디선가 본 알파벳의 조합에 불과했다. 내가 가진 것은 다섯 벌 정도의 갈아입을 옷과 프랑스어 사전이 다운로드 되어 있는 스마트폰 하나가 전부였다. 이대로 괜찮을까. 괜찮을 리가 없다. 하지만 괜찮지 않을 것도 별로 없다. 스무 살에 대학생이 되느냐, 파리지앵이 되느냐 정도의 차이다. 파리에 도착하면 어떻게 할까. 먼저 집을 구하고, 로베르트 드 소르본느 어학원을 찾아 등록을 한다. 내가 받은 어학연수 비자는 12개월을 체류할 수 있도록 허가되어 있었다. 다시 네 계절을 돌아 겨울이 오면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사이 나는 ‘거위들’을 찾아낼 생각이었다. 에르완과 캐롤라인, 그리고 모르간을 만날 것이다. 만나서 무엇을 할 것인지는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만나고 싶었고, 만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스무 살에 그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대학생이 되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부모님이나 나를 맡아줬던 친척 분에게는 무척 곤란한 판단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스무 살이었다. 열 아홉도 아닌 스무 살. 그것도 이제 곧 봄이 오면 별 수 없이 스물 한 살이 되는 스무 살. 내가 내딛을 땅 정도는 이제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항공기가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어폰을 귀에 걸었다. 스마트폰에서 곡을 골랐다. 역시 파리로 출발하는 스무 살 여자아이에게 이보다 좋은 선곡은 없을 것이다. 에디트 삐아프. 라비앙 로즈. 장미빛 인생은 아마도 펼쳐지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분명히 들었다. 그저 유치원 입구에 선, 친구가 하나도 없는 외톨이 아이가 될 뿐이겠지. 철저한 이방인이 될 뿐이겠지. 그걸로 좋았다. 답도 공식도 분명하지 않은 계산을 시작했다는 것이 유일한 기쁨이었다. 끝없는 모호함이 가슴을 뛰게 했다. 창 밖으로 얼어붙은 하늘이 나타났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어보았다. 고국의 마지막 빛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을 감았다. 선배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2015. 9. 16.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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