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글을 쓰는 세상이다. 비디오 스타가 라디오 스타를 죽이는 시대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났고, 영상이 인류의 언어를 대체하리라고 예상했던 20세기 말의 미래학자들은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게 됐다(무덤 속에서 그 일이 가능하다면). 오히려 21세기 인류는 그 어느 시대보다 훨씬 더 문자를 많이 쓰고 읽는 인류가 되어버렸다. 아침에 일어나 스마트폰을 켜면 우리는 모두 누군가가 쓴 글의 독자가 된다. 가끔 우리는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리트윗된 내 글의 독자가 스스로 되기도 한다. 점점 인류는 자기 스스로 글쓴이이자 독자가 되어간다. 문자는 이제 중세 시대처럼 특정 계층의 사유물도 아니고, 고등한 교육을 받아야만 습득할 수 있는 기술도 아니다. 지식과 정보는 문자만 알고 있으면 '검색'을 통해 금방 획..
#1. 오리와 윤동주 윤동주 시인의 시를 좋아한다. 대표단을 선발하라고 한다면 이 시를 빼놓을 수 없다. 귀뚜라미와 나와 귀뚜라미와 나와잔디밭에서 이야기했다 귀뜰귀뜰귀뜰귀뜰 아무게도 알으켜 주지 말고우리 둘만 알자고 약속했다 귀뜰귀뜰귀뜰귀뜰 귀뚜라미와 나와달밝은 밤에 이야기했다 윤동주 시인은 달빛이 엎질러진 잔디밭 위에 누웠을 것이다. 캄캄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들을 헤아렸을 것이고, 적막을 채우는 귀뚜라미 소리를 별의 소리처럼 느꼈을 것이다. 윤동주 시인이 귀뚜라미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아무게도 알으켜 주지 말'자고 약속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으리라. 누구에게나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혹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을 이야기가 있다. 나와 오리 사이의 이야기가 그렇다. #..
GOP근무를 마치고 중위로 진급한 무렵부터 새벽 5시-6시경에 깨어 소설을 썼다. 도저히 글을 쓸 시간이 없어서 시간을 쪼개 쓰기 시작한 게 이제는 습관이 되어 벌써 7년이 넘었다. 그런데 그중 5년 동안 쓴 소설은 조금 허무한 처지가 되어버렸다. 재작년에서야 알았는데 인터넷에 개인적으로 발표한 글이라도 일단 발표가 된 글은 공모전 등에서 심사조차 받지 못하고 탈락이라는 것이다. 약 스무 편이 넘는 소설이 그냥 소모되고 말았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인터넷에 올렸다가 좋은 반응을 얻은 소설을 몇 번 공모전에 내봤다가 번번이 떨어지고 왜 그럴까 생각했었다. 허망한 일이다. 하지만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내가 한 일인 것을. 오늘도 공모전에 내보려고 글을 정리하고 있다. 요즘은 두 편을 내야 한다. 하나는 ..
루시드폴의 아침과 해변의 청소부 루시드폴의 뜻은 '빛나는 가을'이다. 하지만 지금 창 밖에는 꽃이 피는 것을 시샘하는 추위가 서성이고 있다. 곧 봄이 온다는 뜻이다. 언젠가부터 차분히 나를 돌아보며 수필을 써나가는 일이 줄어들었다. 아마도 트위터를 시작한 무렵부터 였던 것 같다. 별 의미 없는 말이라도 마음껏 부려 놓을 수 있으니, 말들을 모아 의미를 만드는 작업이 점점 귀찮아지고 허망해진 모양이다. 2010년부터 2016년에 이르기까지 벌써 6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트위터에 글을 쓰는 것은 이런 느낌이다. 한 여름 해변에 앉아 있다. 각양 각색의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이 모래톱을 서성인다. 어떤 사람은 많이 가렸고, 누구는 조금 드러냈고, 적극적인 사람들은 얼굴에만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쓰고 모든 허물을 ..
허식 虛飾. 실속은 없이 겉만 꾸민다는 말이다. 나는 현대인의 허식이 너무 싫고, 어떤 때는 경멸스러운 감정마저 들 때가 있다. 너무 순진한 건지 나는 사람들이 허식으로 한 말을 거의 다 그대로 믿어버리곤 한다. 그말과 약속이 나중에 허식이었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마음에 작은 상흔이 생긴 이후이다.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너무 보고 싶다. 우리 언제 보자." 라고 밝은 얼굴을 가장하여 말하곤 한다. 그러면 나는 언제? 라고 묻곤 하는데 그럴 때 보통 상대방은 당황한다. 내 입장에서는 상대방이 먼저 보자고 했으니 언제 볼지를 정해야겠다고 여겨 묻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은 대부분 허식으로 한 말일 따름인 것이다. 나의 뜻하지 않은 질문에 상대방은 능청스레 "조만간 연락할게~^^"라고 말하며 얼굴에 이모티..
문득, 길을 잃었다 정말 '문득'이어서 어디서부터 내가 길을 잃은 채 걷고 있었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신해철이 갑자기 죽은 시점부터라거나, 세월호가 침몰한 순간부터라거나, 그도 아니면 박근헤 대통령 당선 발표가 나던 때부터라고 하는 것은 여전히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내가 언제 어디에서 길을 잃기 시작한 것인지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더 도드라지게 할 뿐이다. 길을 잃었다고 해서 대단한 일이 생긴 것은 아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살아가고 있고, 돈을 벌고, 갖고 싶은 물건들을 사모으고, 사람을 만나고 있다. 단지 그것 뿐이다. 문제는 거기에 있다. 내 인생은 어느 순간부터 단지 그것 뿐인 인생이 되었다. 나는 노를 잃었고, 내가 탄 뗏목은 강물 위를 단지 흘러가고 있다. 고 말..
가을의 발걸음 소리가 자분자분 들려오는 듯 하다.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향기나는 햇발이 쏟아져 들어온다. 한가로운 보사노바 음악에 맞춰 게으른 마음을 다독이다 아, 그 때 생각이 났다. 사랑하던 이에게 차마 말 못하고 감춰둔 마음을 어느 맑은 강물에 흘려보내고 싶었다. 나는 여름의 끝자락에 여행을 떠났다. 홀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버스를 타고, 낯 선 풍경들을 바라보다 이름 모를 정거장에 내렸다. 익숙한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의 삶을 혼자 시작해야 했던 그 시절. 내게 삶과 세상은 커다란 무지(無知)였다. 집을 떠나와 주소도 잃고, 온통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들, 거리들. 무명(無名)의 도시에서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은 하늘과 바람, 별과 구름 같은 것이었다. 나는 외롭고 무서웠다. 내가 내린 곳은 경상..
좋은 연인이 되고 싶다는 꿈 좋은 연인이 되고 싶다. 내가 이루고 싶은 꿈 중의 하나다. 물론, 좋지 않은 연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며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없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또 구태여 '좋은 연인'을 '꿈'의 목록에까지 올려놓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 같다. 좋은 연인이 되는 것이 내 꿈의 목록에 올라가 있다는 말은, 내가 현재로서는 상대에게 전혀 좋은 연인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것도 좋은 연인이 되고 싶다고 간절히 소망해야할 정도로 헌저하게. 객관적으로 공표하자면 나는 현저하게 연인으로서 좋은 상대가 아니다. 대학에 합격하고 서울에 상경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훗날 내가 이런 글을 쓰게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순진무구한 소년이었다. 꼰대나 불의를 일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