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를 부탁해 “애 과외비가 얼만지나 알아! 집안 살림을 좀 하든지! 나가서 일을 찾아보든지!! 이제 아주 지긋지긋해!!!” 지긋지긋한 건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의 아빠는 담배를 챙겨 밖으로 나가버렸다. 다시 라이터를 가지러 들어온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아이에게 “아빠 라이터 못 봤냐?”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이의 아빠는 다시 나갔다. 아이의 엄마는 그 하는 양을 사납게 지켜본다. 아이에게도 아이가 사는 집에게도 이제는 익숙한 풍경. 아이의 아빠가 실직을 한 것은 1년 전이었다. 지금은 보험회사를 다니는 아이의 엄마가 벌어오는 돈으로만 세 식구가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초등학교 방학이 되어 엄마가 출근을 하면 아이는 집에 혼자 남았다. 아빠는 엄마가 출근한 뒤에 곧바로 나가서는 저녁 늦..
등단에 대하여 이제 진지하게 모색해볼 때가 아닌가 싶다. 8년 전 즈음이었을 것이다. '최명희 문학상'이란 것에 응모하여 최종 심사까지 올랐다는 연락을 받았었다. 결론은 탈락이었다. 그때 올린 단편이 '쓰리포인트 슛'. 그 이후로는 별로 등단에 대한 노력을 하지 않았고, 공모전 같은 것에 글을 보내본 적도 없다. (2006년에 사이버 문학광장 '문장'에 글을 올려 우연히 상을 받아본 적은 있다.) 엄밀한 의미로 따진다면 1999년 청소년문학상으로 내 이름이 타이틀에 찍힌 책을 출간하였으니 나름 등단의 자격을 부여할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그 정도의 수상은 별 효용이 없는 듯하다. 2001년 겨울에는 고려대학교에서 제정한 전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고대문화상' 소설 부문에 당선되었지만, 역시 별 효용..
그리운 친구에게 오늘 내 집 주소를 모른다던 너에게서 편지가 왔다 내 마음의 주소로 편지가 왔다 지금도 여긴 앞의 길은 멀고 등이 푸른 젊음은 슬렁슬렁 가고 있고 너는 그 멀고 그리운 길가에 서서 전화를 걸려다 동전을 갈마쥐어보며 앞 뒤 모두 푸른 등이라고 피식 울지도 몰라 예전에 달넘이 무렵이면 아무 일도 없는 스무 살 하루하루에 지쳐 진전 없는 서로의 풋사랑 얘기에 취해 노래를 부르고 까닭 없이 기쁜 걸음으로 돌아오던 기숙사 그 벤치에 늘어진 젊음처럼 누워 무성히 자란 나무의 까아만 이파리들과 우리네 시간보다 빛나던 별들을 올려다보았지 그러면 잊고 있던 꿈들이 가슴 속에 반딧불이 마냥 아롱아롱 켜졌더랬는데 새 학기가 다 가도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것만 같던 푸른 봄 집 떠나와 주소도 잃고 돌아갈 곳 없..
백수의 시간들이 이어지고 있다. 동해 여행에서 돌아와 또 혼자 집에 앉아 망중한을 보내고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장한나의 첼로 연주를 듣고 있다는 점이다. 어릴적부터 달동네 단칸방에 살면서도 무슨 심보에선지 나는 중세 귀족 같은 취향이 있었다. 창고로 쓰던 다락방을 개수하여 나만의 공간으로 삼고 밤마다 라디오의 클래식 채널에서 흘러나오는 바로크 음악 따위에 심취했던 것이다. 중학생 시절에는 누구의 음악인지도 모른 채 그저 클래식 음악이라고 뭉뚱그려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랜덤으로 들었다. 고등학교에 와서는 모짜르트를 찾아들었다. 그의 천재적인 음악성과 비범한 광기에 매료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단지 짝사랑하던 여자아이가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 여자아이가 나에게 모짜르트의 '..
너의 의미 이유없이 너를 사랑하던 시간은 다 가버리고 너에 대한 사랑의 이유를 찾아야할 시간이 왔다 우리 왜 서로 그리워해야 하나 우리 왜 서로 손을 맞잡아야 하며 우리 왜 서로 바람 부는 방향으로 걸어가야 하나 함께 있을 때도 혼자 가는 여행 길에서도 도무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어 너와 헤어지기로 했다 너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목에 작년 너를 안고 보았던 흰 눈이 내렸다 나는 그만 아이처럼 울어버렸다 그 하얀 눈이 사랑의 이유인 줄은 몰랐다 너의 의미가 내 속에 있는 줄만 알았지 너와 나 사이에 있는 줄은 몰랐다. 2011. 12. 5. 동해로 가는 야간 열차에서. 멀고느린구름.
4페이지 분량의 마지막 자기소개서 오늘 나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마지막 자소서를 쓰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이 결정은 매우 심대한 실존적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상당히 사소한 사건을 계기로 한 것이다. ‘사건'이라고 이름을 붙이니 뭔가 또 거대해지는데, 아서 코난도일이나 애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에 나올 법한 그런 기묘한 ‘사건'은 물론 아니다. 굳이 그쪽으로 대자면 탐정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문을 열고 집을 나선 순간 그 바로 앞에서 범인이 사건에 대한 상세한 포트폴리오를 작성해 기다리고 있다가, 탐정에게 건내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는 식의 그런 사건이다. -성향에 따라 이 비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 오전에 의류 판매를 하는 A기업의 공채 면접장에 가서 나..
지요(jiyo) - 갈림길 하트점수 : ♥♥♥♥ 자정의 핸드메이드 커피는 특별하다.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잠들기 위해서 라벤더 차 정도를 마시고, 눈을 감은 후 대관령의 별밤 속을 뒤척이는 양떼를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일 것이다. 그런 상식이 존재할지는 잘 모르겠는 것과는 별도로.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잠을 자지 않기 위해 오히려 손수 커피를 내린다. 커피를 마시는 일보다 어수선한 마음을 비우고 떨어지는 물방울에 집중하고 있는 순간, 바로 커피를 내리는 그 순간 잠이 온전히 달아난다. 사랑이 찾아오면 사랑을 하고, 화가 일면 화를 바라보고, 파도가 밀려나면 그 밀려나는 순간을 지킨다. 잠이 오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는 것이 자연의 하나가 아닐까. 그래서 난 자정의 핸드메이드 커피를 마시고 있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