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행복하니?” 남자는 여자에게 물었다. “행복해.” 여자가 답했다. 날짜 변경선을 지나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이 두 사람을 감쌌다. 지구 남동쪽 끝에 위치한 뉴질랜드의 북섬, 그 중에서도 오클랜드나 웰링턴이 아닌 라에티히라는 시골마을에서 두 사람이 만날 줄은 몰랐다. 여자와 남자가 나란히 앉은 언덕 뒷편으로는 라타나 교회가 미대 수험생의 정물화처럼 놓여 있었다. 남자는 대뜸 행복에 대해 물어놓고는 말이 없었다. 남자가 뜬금없는 질문을 하기 전까지 두 사람은 둘이 만나기까지의 자초지종을 나누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친구의 출장에 동행취재 작가라는 명목으로 함께 하는 중이었다. 남자의 여자친구는 유명 출판사의 에디터로 애거사 크리스티와 함께 추리소설의 여제로 꼽히는 나이오 마시의 판권작 출판계약을 위해 ..
남정은 여인 모르게 눈물을 훔치고는 태연한 채를 했다. 사과 껍질이 다 깎여 나가고, 여인은 나룻배 모양으로 사과를 자르기 시작했다. 곱게 빚은 나룻배를 여인은 남정의 입에 넣어주었다. 남정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먹었다. 흰 나룻배가 여인의 손에서 남정의 입 사이를 몇 차례 오갔다. 남정은 오래 감춰두었던 욕심이 다시 머리를 내미는 것을 느꼈다. 남정의 눈이 뜨거워졌다. 여인도 그것을 느꼈지만 모른 채했다. “행복하니...?” 불현듯 남정이 물었다. 여인은 답하지 않았다. 계속 사과조각을 집어 남정의 입에 넣을 뿐. “대답해봐, 행복하냐고... 말해도 되잖아 그냥, 행복하다고. 그런 거라고.” 여인이 다시 한 번 사과조각을 집어서 남정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남정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여인은 사..
50 “오랜만에 퀴즈... 아도니스의 꽃말은?” 여인은 제가 품에 고이 안아 온 화병을 쓰다듬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하얀 민무늬 도기병에 한 송이 노란꽃이 피어올라온 모양이 단아했다. 병상에 누운 남정은 쉬이 입을 떼지 못하고 ‘음...’이라고 긴 소리를 내며 골똘히 생각했다. “글쎄... 잘 모르겠어.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왔던 미소년이었던 건 알겠는데 말이야. 아프로디테와 페르세포네의 사랑을 동시에 받아 죽고 말았던. 혹시, 꽃말이 아름다운 남자 이런 건가. 나한테 어울리는데?” 여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턱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남정의 얼굴을 쏘아보며 “으이구. 이제 일어나도 되겠다. 기껏 생각해서 와줬더만. 올 필요도 없었던 거 아냐? 사실은 꾀병이지?” “미안 미안, 농담이야. 그래서 꽃말은?” “..
기억의 습작 작사/곡 김동률다시 노래 멀고느린구름 이젠 버틸 수 없다고 휑한 웃음으로 내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았지만 이젠 말할 수 있는 걸 너의 슬픈 눈빛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걸 나에게 말해봐 *너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볼 수만 있다면 철없던 나의 모습이 얼만큼 의미가 될 수 있는지 많은 날이 지나고 나의 마음 지쳐갈 때 내 마음속으로 스러져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찾아와 생각이 나겠지 너무 커버린 미래의 그 꿈들 속으로 잊혀져 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생각날까 ** 워~ 라라라 워~그 꿈들 속으로 그 속으로너에게... --------------------------- 영화 을 보며 새삼 반가웠던 곡. 고등학교시절 무던히도 많이 불렀었다. 학교를 오가는 길에, 혼자 달동네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
“나도 물어도 되나...?” 노옹이 폭포수 소리에 묻힐듯 말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노파는 가까스로 말 뜻을 알아챘다. “뭘?” “아까 네가 물어본 거. 여기는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노파는 말끝을 흐렸다. 노옹은 노파의 사정을 짐짓 짐작하고 있었지만 선뜻 물어보긴 곤란한 눈치였다. 한동안 말성이던 노옹은 목소리에 힘을 주며 다시 말을 시작했다. “얘기 들었어... 사별했다며..” “사별은 무슨... 이 나이 즈음이면 가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자연스러운 거라고 생각해...” 그러고는 노파는 얼마간 생각에 잠기어 있더니 다시 천천히 입을 떼며 “자연이란 평온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저 고요가 무섭기도 한 거야 그렇지...?” 하고 계곡의 신령에게 묻기라도 하듯이 넋을 잃고 폭포수 쪽을 ..
60 박수기정은 제주 올레길 9코스의 시작점이었다. 박수는 제주도 사투리로 물을 마시는 바가지이고, 기정은 절벽이라 했다. 병풍처럼 펼쳐진 기다란 바위절벽 위에 샘이 있어서 그리 이름지었다고 들었다. 올레길 코스 가운데 그나마 가장 짧은 코스라고 해서 선택했지만 처음부터 오르막이었다. 노파는 다소 후회하면서도 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좁다란 숲 길을 지나 박수기정 정상 부근에 다다르니 넓다란 길이 나왔다. 관광객들을 위해 닦아놓은 길이었다. 노파의 이마에는 벌써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혔다. 숨도 가빠왔다. 노파는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그리고는 가만히 자기의 주름진 손바닥을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이제는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많았다. 벤치에 앉아 구름 한 점 없는 여름하늘을 올려다 보며 상념에 빠..
저녁의 유람선 저녁의 유람선을 타고 우리는 얼어붙은 강을 녹이고 있었다 물결에 떠밀려 선창으로 스미는 인공의 별들을 뒤로하고 네 눈동자에 숨긴 별을 찾고 싶었다 관광을 나온 이국인들은 이국의 정취에 취해 말을 멈추지 못했다 나는 오로지 너의 멈추지 않는 말을 오래도록 듣고 싶었다 마냥 너의 말에 취하고 싶은 저녁이었다 늦은 겨울은 세찼다 손의 온기가 식지 않도록 애썼다 너의 손에 그 온기를 넘겨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유람선이 종착지에 가까워 가고 있었다 어디에서도 내리고 싶지 않았다 영원한 겨울과, 영원한 저녁, 영원한 유람선이 세상 어딘가에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사랑은 어디쯤에서 반드시 그친다는 말을 사랑할 수 없었다 저녁의 유람선은 순환코스를 돌아 다시 잠실 선착장에 닿았다 우리는 배에서 내렸다 그때..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라고 말을 건내며 노파는 한 쪽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긴다. 노옹은 자신 앞에서 일어난 일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가락으로 두 눈을 세차게 비빈다. 현기증도 인다. 아직 정신은 흐려지지 않았다. 노옹은 다시 눈 앞에 선 노파의 얼굴을 확인한다. 주름 골이 깊이 파여 세월의 흔적이 선연하지만 여전히 오래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반달 같은 이마, 바람이 스친 자국처럼 가느다란 눈썹, 깊은 우물을 닮은 눈, 고운 곡선을 그리는 코, 동화 속 소녀마냥 옅고 얇은 입술. 이런 것들은 변하지 않았다고 노옹은 생각한다. 노파는 노옹이 앉아 있던 벤치에 내려앉았다. 노옹은 일어선 채다. “뭐해? 앉아요. 헛것 보는 거 아냐.” 노파가 어린아이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