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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벚꽃 아래에선 몰랐네

멀고느린구름 2019. 5. 13. 08:24

봄이 지나가고 있다. 녹음은 짙어지고, 어린 새들은 자란다. 아침이면 어디선가 날아와 지저귀는 작은 새들의 목청이 어제보다 커졌다. 돌이켜보면 나는 내가 자라나는 것에 대해 민감하게 느끼지 못했다. 그냥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 있었다는 쪽에 가깝다. 격동의 사춘기라고 해도 워크맨과 함께 정처없이 거리를 걷고, 농구공으로 수 천 번의 포물선을 그리고, 가끔 숲 속에서 하늘에 펼쳐진 구름을 바라본 기억들이 대부분이다. 

 

20대에 대해서도 그런 식의 이야기를 썼던 것이 얼마 지나지 않은 듯한데, 어느새 30대에 대해서도 그런 이야기를 써야 할 때가 되었음을 어제서야 알았다. 무심코 계절을 흘려보내고 있었는데, 오랜 친구에게서 30대의 마지막 여름을 잘 보내자는 메시지가 도착한 것이다. 잠깐, 이럴 수가! 이번에 지나간 봄이 30대의 마지막 봄이었다니... 나이의 숫자가 바뀌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살아가고는 있으나, 이건 경우가 다르지 않은가. 

 

왜냐하면 청춘이란, 푸를 청에 봄 춘 자를 쓰기 때문이다. 내 물리적(?) 청춘은 이렇게 가버린 줄도 모르게 가버리고 말았다. 스스로 강행한 이사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남에게 책임을 추궁할 수도 없으니, 담담히 청춘의 종언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푸른 봄아, 잘 가렴.  

 

그나저나 이사를 하고 '구름정원'이라 이름을 붙인 새 집에서 처음 정식으로 쓰는 글이다. 의식하지는 못했어도, 무의식으로는 나의 한 시절이 끝났음을 알고 있었던 건지, 나는 모든 것을 새로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곳에 옮겨 왔다.

 

그러나 기대는 곧 어긋나버렸다. 너무 많은 것들을 과거로부터 짊어지고 왔다. 20년 간의 청춘이 드리운 그림자들 또한 내 발치에, 머리맡에 서성인다. 잔바람이 불면 흔들흔들 가벼운 춤을 추며 나를 먼 슬픔과 고독 속으로 다시 불러들인다. 청춘이 물리적으로나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 축복일지도 모르겠다. 긴 그림자들도 언젠가는 보이지 않게 되겠지. 물론, 내가 청춘으로부터 멀리 떠난다는 가정 하에서만 말이다. 

 

140센티미터 층고의 낮은 다락방에서 이 글을 쓰며 멀리 진초록빛에 덮여가는 산을 바라본다. 그 아래로 차들은 바쁘게 웅웅 지나고, 다 자란 새들은 무심히 하늘을 가른다. 봄이 이리 가버릴 줄이야, 벚꽃 아래에선 몰랐네. 

 

2019. 5. 13.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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