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산문/에세이

씨디플레이어를 멈출 때

멀고느린구름 2018. 12. 1. 08:58

씨디플레이어를 멈출 때



아직 노래가 다 끝나지 않은 씨디플레이어를 멈출 때면 늘 열심히 노래하고 있는 가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망설이게 된다. 어지간하면 적어도 하나의 곡은 끝이 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스톱 버튼을 누르곤 한다. 오늘 아침에는 한 듀오의 노래를 듣다가, 쓰려는 글과 어울리지 않아 중간에 멈추고 말았다. 


어쩌면 아직 침대에 누워 주말의 단잠을 자고 있을 그 가수는 지구의 어딘가에서 자신의 노래가 중간에 끊겨버렸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또한 그게 그리 대단한 충격파를 던질 사건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카리브해에서 출발한 물결이 오랜 세월을 지나 언젠가는 경포대의 모래톱을 적시는 것처럼, 내가 멈춘 단 한 번의 음악도 한 가수의 삶을 흔들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까지 생각해버리면 인생은 온통 지뢰밭이다. 한 마디, 한 걸음, 한 호흡, 한 손짓이 모두 무거워지고, 나란 인간은 만악의 근원으로서, 에덴동산의 이브나 아담 같은 게 되고 만다. 서로를 사랑했던 두 사람은 고작 나무에 열린 사과 하나를 따먹은 일이 후손들에게 그렇게 두고두고 욕먹을 일이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 인간이라는 것도 참 지겨운 존재들이다. 사과 하나의 실수를 가지고 아직까지 그 두 사람을 들먹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모를 일이다. 오늘 아침 내가 한 듀오의 음악을 중간에 꺼버린 일이, 2만 5천 년 정도 후에는 대성당의 예배 시간에 두고두고 회자될 일이 될지 말이다.


변변한 사회적 지위도 없는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이토록 거창한 잡념을 부풀려 떠올릴 수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이란 종 속에 설계되어 있는 오만함은 그 한계가 없다. 스스로를 신으로 여기는 이들도 세상에는 수두룩하니 말이다. 


듀오의 노래를 매정하게 꺼버리고, 새로 넣은 음반은 독립서점 유어마인드가 제작한 <새벽을 위한 믹스테잎 2>였다. 두 번째 앨범을 사두고도 늘 <새벽을 위한 믹스테잎 1>만을 들어왔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게 가장 강력하고 무서운 이유지만) 사람은 다들 "글쎄? 모르겠는데?"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익숙하게 해버리는 일들이 있다. 대게 그런 일들은 '자아'와 강력하게 결탁되어 있어서, '나'를 나라고 믿게 만드는 데, 즉 자아정체감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소유한 '버릇'을 곧 자신이라고 믿게 되니까. 


예술가로서 '나만의 것'을 구축해야 한다는 생각과 사색가로서 '나라는 존재가 정말로 있는가?'하는 물음은 늘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요즘은 종종 현대적 인간이란 그저 '언어'일 뿐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웹 속에 떠다니는 글자들과 인간의 내면은  과연 얼마나 서로 다를까. 사람 사이의 변별은 단지 우리 속에 저장된 글자들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마치 유전정보처럼 가까운 미래에 수치로서 정량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아는 태그 클라우드로 표현되고, 당신과 나 사이의 언어 리스트가 몇 퍼센트 다른 지도 금방 알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가능해지는 미래와 지금은 무엇이 다를까. 사람들은 변함없이 클라이막스를 향하는 가수의 노래를 중간에 꺼버릴 것이다. 북극의 빙하가 무너지고, 그렇게 생성된 물결은 긴 여행 끝에 처음 바다를 만난 아이의 발목에 어느날 부딪칠 것이다. 무수한 연인들은 "글쎄? 잘 모르겠는데?" 라고 말하며 헤어질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흰 수염을 기른 남자 노인과 함께 돌아오고, 우리는 영원히 외로울 것이다. 2만 5천 년 후의 인류는 (그들이 존재한다면) 우리를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손수 커피를 내리고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즈음 글을 쓰다보면 커피 잔 바닥 가까이에 한 모금 남짓의 식은 커피액이 남는다. 마시기에는 아깝고, 마시지 않으면 더 식어서 맛이 없어져버리는 곤란을 겪는다. 가끔은 따뜻한 물을 더 부어서 커피차로 우려낸 후 좀 더 오래 마시고, 가끔은 망설임 없이 입 안에 털어버리고 끝을 낸다. 인생의 선택지란 늘 그런 식이다. 방금, 남은 커피를 그냥 삼켜버렸다. 어쩌면 2만 5천 년 후 대성당에서 회자될 이야기는 바로 이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2018. 12. 1. 멀고느린구름. 


'산문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 하늘에는 구름이 없다  (0) 2019.05.29
벚꽃 아래에선 몰랐네  (0) 2019.05.13
마음과 몸  (0) 2018.11.08
사랑이라는 숙제  (0) 2018.08.11
당신과 나 사이에  (0) 2018.07.25
Comments
최근에 올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