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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오늘 하늘에는 구름이 없다

멀고느린구름 2019. 5. 29. 07:59

 

방금 내린 케냐AA 한 잔과 함께 처음 집필실 책상에 앉았다. 고개를 오른 쪽으로 살짝 돌리면 창으로 길죽한 직사각형의 하늘이 보이는 곳이다. 아직은 책상 하나와 몇 개의 악기들을 늘어놓았을 뿐, 인테리어를 시작하지 않았다. 벽지와 벽지 사이의 틈이 갈라진 곳도 있고, 진득한 테이프 자국이 남은 곳도 보인다. 이런 것 정도는 보수를 해달라고 요청한 뒤 이사를 했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지난 겨울 별 생각 없이 이 마을을 찾았다. '다방'이라고 하는 부동산 매물 찾기 앱을 통해 본 다락방이 있는 작은 집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특별히 이사를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주말에 심심하니 남의 집이라도 보고 다니자는 심산이었다. 마을에 도착해 앱에 있는 연락처로 연락을 했으나  오늘은 보기 어렵다는 답을 받았다. 어차피 심심풀이로 왔기에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기로 하고, 회색 코트의 옷깃을 여민 채 타박타박 마을길을 걸었다. 단정한 마을이었다. 한 켠에 고층 아파트 단지가 있으나, 마을의 중심은 5층 미만의 나즈막한 빌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외벽으로 보이는 수 많은 창문 속의 사람들은 왠지 찐 고구마를 사이좋게 나눠먹고 있을 것 같았다. 나도 이 집들 가운데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찐 고구마 껍질을 벗기고 싶었다. 

 

마침, 주말임에도 문을 연 부동산이 있어서 이사를 준비하는 사람인 척 들어갔다. 예전 대안학교 교사시절 동료 선생님의 별명과 똑같은 이름을 쓰는 부동산이었다. 바로, 그 부동산에서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집을 소개 받았다. 연남동 시절의 집과 닮은 너른 거실이 있고, 하늘에 가까운 마당과 별채로 있는 옥탑방, 그리고 비밀 다락방까지 있는 집. 어쩌면 내가 가지고 싶었던 모든 것을 꾹꾹 눌러 담아놓은 이런 공간이 있을 수 있을까 놀라울 정도였다. 가슴이 뛰었다. 여기라면 뭔가 이루어질 것 같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조건의 집이다. 얼마 남지 않은 젊은 날에 만날 수 있는 최상의 공간이다. 여기다 바로 여기다. 내가 나에게 건 최면은 대단히 강력했고, 결국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이사를 감행했다. 

 

이사 온 지 한 달. 몸은 무사히 옮겨 왔지만, 아직까지 마음은 온전히 옮겨 오지 못한 상태다. 이전에 살던 오리빌라가 아직도 그대로 내 명의로 남아 있어 월세가 지출되고 있고, 그탓에 새로운 집의 인테리어는 자금 부족으로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시절의 문제들도 온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마음을 정돈하고 인테리어도 끝낸 집필실에 와서 첫 글을 쓰고 싶었으나... 그러려면 얼마나 더 시간이 걸릴지 가늠할 수 가 없어, 어수선한 상태이나마 첫 삽을 뜨고, 새로운 시절의 씨앗을 심는다. 

 

오늘 하늘에는 구름이 없다. 며칠 전에는 커다란 커튼을 빨랫줄에 널어놓은 것 같은 구름이 연파랑 하늘 가득 걸려 있었다. 얼마 전 노을이 질 무렵에는 뜯어낸 솜사탕 같은 구름들이 바다로 향하고 있었다. '멀고느린구름' 이라는 이름을 19년 째 쓰고 있는데, 비로소 이름에 걸맞는 집에 살게 되었다. 그다지 성공한 인생도 아니지만, 그다지 실패한 것만도 아닌 인생이라 다행이다. 여름이 오고 있다. 모쪼록, 새로운 시절과 기쁨의 순간들도 함께 데리고 와주기를 바란다. 

 

 

2019. 5. 29.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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