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페이지 분량의 마지막 자기소개서 오늘 나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마지막 자소서를 쓰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이 결정은 매우 심대한 실존적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상당히 사소한 사건을 계기로 한 것이다. ‘사건'이라고 이름을 붙이니 뭔가 또 거대해지는데, 아서 코난도일이나 애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에 나올 법한 그런 기묘한 ‘사건'은 물론 아니다. 굳이 그쪽으로 대자면 탐정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문을 열고 집을 나선 순간 그 바로 앞에서 범인이 사건에 대한 상세한 포트폴리오를 작성해 기다리고 있다가, 탐정에게 건내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는 식의 그런 사건이다. -성향에 따라 이 비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 오전에 의류 판매를 하는 A기업의 공채 면접장에 가서 나..
우주 어딘가에 또 한 마리의 토끼가 틀림 없어. 우주 어딘가에 또 한 마리의 토끼가 분명히 있을 거야.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서려 있다.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힘을 주어 말을 이어갔다. 물질을 구성하는 모든 입자에는 반입자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라는 말 알지. 내가 어떤 것에 힘을 가하면 그에 반하는 힘이 작용하는 거야. 모든 생명체는 우주로 보자면 어떤 힘이 작용한 결과야. 그렇다면 그에 대한 동일한 반작용의 힘이 가해지기 마련이고, 그로 인해 반입자는 탄생하는 거야. 그것이 이 광대한 우주, 그러니까 칼 세이건이 빌리언 오브 빌리언이라고 표현한 끝없는 시공의 어딘가에 반드시 있는 거야. 여기 서 있는 너와 나도 우주 저 편에 또 하나가 존재하는 거지. 아니, 하나가 ..
어느 날 두 개의 벤치가 어느 날 하나의 벤치가 또 하나의 벤치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또 하나의 벤치는 깜짝 놀라 대답조차 못했다. 옆에 있는 벤치가 자기에게 말을 걸어온 것이 정확히 93년만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저기... 미안하지만 잠자고 있지 않으면 대답해줄 수 있을까?" 또 하나의 벤치가 자는 척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잠을 자기에는 하늘이 지나치게 파랬고 바람은 겨울의 숨 소리처럼 높고 서늘했다. 또 하나의 벤치는 별 수 없이 오래 묵은 자신의 목소리를 꺼냈다. "무슨 일이니?" "역시 깨어 있었구나. 분명히 93년만이지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게?" "응" "난 갑자기 그런 의문이 들었어. 93년 전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렇게 서로 이야기하지 않고 지내는가..
건너지 마시오 음 그렇다. 저건 ‘건너지 마시오.’다. 분명히 횡단보도에서 검은 색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지면 ‘건너지 마시오.'라는 뜻이다. 주황빛처럼 건널까 말까도 아니고 명백히 거기 멈추라는 뜻이다. 단호하고 결의에 찬 빛깔이다. 200미터쯤 떨어진 거리에서 초록불빛을 발견하고 우사인 볼트마냥 전력 질주해왔건만 코 앞에서 신호등은 빨간불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도무지 세상은 불공평 투성이다. 모든 것이 운에 의해 좌우될 뿐 사력을 다해 노력해온 사람에게는 좀체 마땅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았다. 툴툴거리며 횡단보도 앞에 서있자니 마음 속에서 악마가 마이크를 잡는다. “이봐, 바보냐. 그냥 건너라고. 시간이 아깝다 정말. 보라고. 차도 한 대 안 다니잖아. 게다가 여긴 정식 횡단보도도 아니잖아. 속 터지니..
눈을 떴더니 우주 속에 홀로였다. 그리고 모든 것을 5분 정도밖에는 기억할 수 없었다. 앞은 물론 뒤로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만져지는 것조차 없었다. 아니, 어쩌면 ‘만지다’라는 언어 자체가 그곳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나머지 살려달라고 외쳤다.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소리가 전달되지 않았다. 공기의 입자들이 공간 속에 못처럼 박혀 있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무엇도 흘러가지 않고 흘러들지 않았다. 망연해진 나는 그만 자리에 주저 앉아버렸다. 내가 앉은 곳이 바닥인지 허공인지 정확하지 않았다. 혹은 내가 정말 앉은 것인지 혹은 그대로 서 있는 것인지, 아니면 누워버린 것인지조차 정확하지 않았다. 어차피..
5 결국, 사람과 사람은 서로를 어떻게 이해하게 되는 것일까. 사람에게는 ‘말’이라는 도구가 주어졌지만 ‘말’로 인해 사람들은 서로를 오해했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믿는다. 믿지 않는다. 사실이다. 거짓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가는 공기의 진동에는 물리학적 실체로서의 ‘정보'가 담겨 있지 않다. 정보는 오직 빛 -혹은 입자-를 통해서만 타자에게 전달된다. 포유류를 비롯한 짐승들은 위급한 순간 사용하는 단순한 몇 개의 음성신호를 제외하고는 모두 ‘빛'을 통해서만 정보를 전달한다. 인지과학자들은 이것에 ‘변연계 공명'이라는 까다로운 말을 붙여 사람들의 이해를 차단했다. 다시 표현하자면 변연계 공명이란 직감을 통한 전달이다. 뇌와 뇌, 눈빛과 눈빛, 마음과 마음 사이의 순간적인 대화이다. 아버지와..
4 아버지가 갑자기 응급 수술실로 들어갔다고 담당 간호사에게 연락 받은 것은 새벽 세 시경이었다. 나는 다음날 발표할 프리젠테이션의 키워드 색깔을 파란색으로 할지 초록색으로 할지 고민 중이었다. 파란색으로 하자니 검은색의 배경에 잘 어울리지 않았고, 초록색으로 하자니 계절과 맞지 않았다. 결국 이것도 저것도 아닌 노란색으로 키워드를 색칠하고 대충 옷을 껴입었다. 집밖으로 나서니 서늘한 북풍이 뺨을 세차게 때렸다. 어느덧 10월이었다. 늦여름의 기운도 사그라들고 있었다. 차를 몰아 급히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1시간이 지나버린 4시 23분이었다. 그 사이 아버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고 있는 사실이 없었다. YTN은 정작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았다. 새벽에도 여전히 전세 대란..
3 아버지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의사는 해볼 것은 다 해보았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물론 그 준비운동의 비법은 공개하지 않았다. 언제나 인생의 핵심 비법은 비공개 영역이었다. 스스로 터득하는 수밖에 없었으며, 스스로 터득한 것을 비법이라고 믿는 수밖에 없었다. 갈라보기 전의 수박처럼 인생은 망막했으며, 근원적으로 피로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고, 시선은 창밖의 새를 좇았다. “새를 한 마리 사줄까요? 하얗고 작은 새로 말이에요. 그런 새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다음에 올 땐 스위트피 화분도 하나 가져다 줄게요. 책은 읽을 수 있어요? 황석영이 새 소설을 썼어요. 아, 황석영 좋아하던가. 이문열 쪽이 나으려나요? 얼마 전에 박완서 선생이 돌아가셨어요. 박경리 씨 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