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젊을 때의 아버지는 좀 더 혈기왕성한 사람이었다. 전태일의 죽음에 분개하고, 광주학살에 눈물을 흘렸다.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에 나서는 일이 많았다. 낭만적 세계의 건설을 위해서였다. 독재자는 사라졌고, 노동법은 준수되기 시작했다. 함께 싸웠던 몇몇은 민주화 투사의 훈장을 달고 정치인이 되었다. 아버지는 다만 원래의 장소로 돌아왔다. 곁에는 젊은 투사와 사랑에 빠진 소녀가 있었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일하던 공장의 경리였다. 모두가 그녀를 사랑했지만, 성공한 것은 아버지였다. 내가 태어났고 80년대는 사랑보다 빠르게 사라져 갔다. 현상에서 현실적인 요소들을 제거할 때만 ‘낭만성'은 획득되었다. ‘낭만성'이라는 꽃은 상상력이 허락되는 백지의 정원에서만 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낭만적이었으..
아버지와 킹콩 1 아버지와 킹콩을 보러 갔던 적이 있었다. 정말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억이 남아 있다. 어째서였을까. 아버지는 다정하게 자식의 손을 잡고 영화관따위를 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 보았던 커다란 영화관의 스크린, 흑과 백으로만 구성된 영화, 조악한 킹콩, 그리고 영화에 진지하게 몰두하며 긴장하고, 웃고, 울기도 하던 아버지의 표정. 어른이 되어 다시 킹콩을 찾아보았다. 그때의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던 세월만을 살아왔다. 아주 가끔씩 이해해보려한 적은 있었다. 그때마다 ‘역시 이해 못해.’라는 결론만을 얻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낭비할 시간은 없는 시대였다. 1492년 10월 12일, 콜롬부스가 아메..
파리씨, 생명주의자를 만나다 알베르토씨는 지금 막 [지구생명국제심포지엄]에 참가하고 오는 길이다. 알베르토씨는 심포지엄에서 라는 주제발표를 했다. 평소 동양철학에 조예가 깊던 알베르토씨는 노자의 자연주의 철학과 양자역학을 바탕으로, 서구유럽의 휴머니즘을 극복하는 방안을 연구 중이었다. 알베르토씨는 결국 노자를 바탕으로 독특한 물철학, 이른바 워터필로소피의 기초를 마련했다. 워터필로소피의 요점은 모든 생명체에는 물이 깃들어 있으며, 물을 함유하고 있는 존재는 모두 인간과 동등한 생명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알베르토씨는 우주 역시 물로 파악한다. 그에 의하면 우주의 모든 별은 허공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라는 거대한 바다 속에 잠겨 있다는 것이다. 생명은 모두 물로부터 나와 물로 이루어지고 물..
세상의 모든 저녁으로 가는 방법 버스 구석 자리에 앉아 귤을 까서 입에 넣고 있을 때였다. 귤빛 노을이 부시게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세상의 모든 저녁으로 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노을의 조금은 긴 이야기 속에선 시큼한 맛이 났다. 입 안의 귤은 다소 쓸쓸해했다. 버스는 어느 정류장에서도 멈추지 않고 세상의 모든 저녁으로 달려갔다. 버스에 앉아 있으면 세상의 높고 차가운 소리만 들려온다. 낮고 따스한 소리는 단단한 유리창에 의해 검문 당한다. 쓸쓸해하는 귤에게 한 자락 위로가 될까하여 지나간 노래들을 흥얼거려 본다. 노래 속에서는 오래전 헤어진 연인이 웃고 있기도 하고, 저주하고 있기도 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사랑은 즐거운 것이었는지, 저주 받을 죄였는지, 양희은의 노래처럼 쓸쓸한 것이었는지..
‘그때가 아닌 지금…’ 이라고 생각되는 때가 있다. 가령 2년 전 헤어진 연인과 자주 드나들던 바에서 그 당시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듣게 된 지금과 같은 때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그날도 오늘과 같이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의 연주였다. “전생이 있다면 난 분명 러시아인이었을 거야.”라고 나는 무심코 내뱉었다. 나는 J와 12월의 마지막날, 흡사 모스크바의 거리와도 같았던 눈덮인 세종로를 거닌 후 보신각의 종소리를 듣고 홍대의 단골 바에서 새해를 맞이하고 있었다. “어째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을 듣고 있으면 내 몸 속의 어떤 피가, 아마 그건 투명한 하얀색일 거야. 아무튼 그 피가 보드카를 원하거든. 바로 지금처럼.” “하하. 뭐야. 단순히 알콜중독자의 변명 아냐.” “진심이야...
마피아 "그러니까 말야. 아까부터 선배의 눈동자가 굉장히 흔들리고 있거든. 대체 왜 그런 걸까. 나는 선배가 마피아가 틀림없다고 생각해." 날카로운 C가 말했다. 단호한 어조였다. 이제 막 게임을 참가한 사람이라면 '이런 끼어들자마자 끝나버렸군.'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지목을 당한 A선배는 말 주변이 없는 사람이었다. A선배는 담담하게 "나는 아니다."라고 교과서 2페이지를 펴는 학생처럼 답했다. 논리적이지 않은 것이 되려 신뢰감을 주었다. "맞아. 선배가 마피아라면 아까 98학번 D선배를 죽이지 않았겠지. 이제 마피아는 단 한 사람이고. 우리는 4명이나 남았으니까 말야." 남몰래 A선배를 좋아하고 있던 안경을 쓴 B의 말이었다. "일리가 있어. 잠깐! 아까 D선배를 죽일 때 손을 내리지 않은 게 단발..
잃어버린 사랑을 찾습니다 1.신애, 조금은 거짓? 신애는 161번 버스 안을 오늘도 서성였다. 그러나 무소득. 누군가 161번 버스 제일 뒷좌석에 그녀의 남편이 누워 있는 걸 보았다는 것이었다. 벌써 며칠 밤 전의 낡은 정보인데다가 남편은 버스를 탈 줄도 몰랐지만 신애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편이 허름한 스웨터와 조금 얇은 겨울바지만 입고 집을 나가서 실종 된지 벌써 네 달이 넘어가고 있건만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정. 깊은 밤에 잠긴 도시에는 창백한 나트륨등만이 주저리주저리 허공에 걸려 있었다. 신애는 자옥한 어둠이 깔린 거리 위를 마냥 발밤발밤 걸었다. 그녀의 남편이 그 어둠 어느 편에 절지동물마냥 몸을 돌돌 만 채 잠들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거리..
序文 프랑스 인권선언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인간은 권리에 있어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 생존한다. 사회적 차별은 공동이익을 근거로 해서만 있을 수 있다.”우리사회에는 우리가 인식 못하는 그늘진 곳에서 넉넉한 다수의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일방적으로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릴 적 저는 달동네에서 살았습니다. 언젠가 TV에서 그런 달동네의 집들이 강제로 깡그리 헐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은 그 이후 3년간 천막에서 살았고, 이제는 소식이 끊겨 어떻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공공의 이익을 위하는 일이라지만 한 개인의 삶을, 한 가족의 평화를 그렇게 무참히 깨뜨려도 되는 것일까요? 이런 의문에서 저는 부족한 솜씨나마 이 글을 씁니다. 타인의 세상 흔적 그날 따라 날이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