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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대 303과 <작은 마음>
우리의 생은 때로 어떤 음악에게 빚을 진다. 오지은 서영호의 프로젝트 음반 <작은 마음>을 씨디플레이어에 걸고 첫 가사를 들었을 때 내가 이 음악에게 빚을 지겠구나 직감했다. 이 음반이 첫 번째 트랙부터 마지막 트랙까지 유지하고 있는 분위기를 표현하자면 다소 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쓸쓸함이라거나, 외로움 같은 말로 간단히 표현하거나, ‘멜랑꼴리’ 같은 세 줄 짜리 음악평론에 등장하는 어휘를 사용할 수는 없다.
20대 시절에 나와 친구들은 양명대 303에서 종종 모여 대통령 선거라든가, 마음이 이끌리기 시작한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양명대’는 우리 중 한 친구가 살던 빌라의 이름이고, 삼공삼은 당연히 303호실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다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편이었지만, 묘하게도 양명대 303에서는 술잔을 기울이게 되었고, 그만큼 실속없는 솔직함을 과시하는 자리가 되곤 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싸웠고, 울었고, 외로웠으며, 동시에 청춘의 뜨거움을 느꼈다.
<작은 마음>에는 ‘404’라는 곡이 실려 있는데,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바로 그 양명대 303을 떠올리게 된다.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 / 슬퍼지는 이유는 / 잠시라도 / 가질 수 없다는 걸 / 알게 되었으니까”
라는 가사를 들으며 20대의 우리는 청춘이었으나, 영원히 그 청춘을 우리의 것으로 소유할 수는 없었구나 하는 생각에 이른다. 어떤 세대이든지 청춘은 청춘의 것이 아니었다. 청춘은 사실 지나가버린 자의 것일 뿐이다.
30대가 된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연남동이라고 부르는 동교동 일부 구역의 다세대 주택 202호에 머물게 되었다. 내가 처음 그 202호의 문을 열었을 때만 해도 연남동(사실은 동교동)은 연탄가게와 유통기한이 3년 지난 라면을 파는 ‘수퍼마켓(슈퍼마켓 아님)’이 있던 동네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에 들어서면 시간의 터널을 지나 1990년대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지금의 그곳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202호에서 나는 <작은 마음> 속의 모든 마음들을 여행했다. 이별을 한 뒤 사랑을 했고, 사랑을 한 뒤 이별을 했다. 그리워하다가 마음을 비웠고, 빈 마음에 다시 스스로 그리움을 채우곤 했다. 무거운 여름의 공기는 나를 쓸모 없는 녀석이라고 질책했다. 창 밖으로 눈이 나리고, 오래된 사랑의 기억들이 불어올 때면 ‘자고 가요’의 가사처럼 누구라도 내 곁에서 자고 가기를 바랐다.
지금은 101호의 부엌에 앉아 이 글을 쓴다. 묘하게도 한 층씩 내려온 인생이었다. 잘 모르겠지만 위로를 주는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대라고 한다. 다소 고약한 성미를 지닌 나는 위로를 주려고 작정한 글에 굳이 위로를 받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그다지 위로를 하는 글 같은 것도 세상에 보태고 싶지 않다. 오지은 서영호의 <작은 마음>이 아무런 위로를 하려고 하지 않아 좋다. 울지도, 화를 내지도 않아서 그저 좋다. 나의 소망은 오로지 이 노래들이 이따금 나의 방에서 자고 가는 것이다. 앞으로 내 방이 505가 되든, 707이 되든 말이다.
사람이 저마다 지니고 태어나는 외로움은 천국에 이르거나, 해탈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해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주 가끔 세상에는 나의 작은 마음과 닮은 노래들이 태어나 아무도 몰랐던 내 마음의 이름을 나즈막이 불러주곤 한다. 그걸로 됐다. "괜찮아." 라고 말해주지 않아도 좋다. 어느날 노래가 내 빈 방에서 하룻밤 잠들고 가면 족하다.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밝아 올 때 곁에 있어줄 음악을 만난 것은 그저 소중한 축복이다.
2019. 3. 1.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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