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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르 (2012)

Love 
7.7
감독
미카엘 하네케
출연
장 루이 트렝티냥, 엠마누엘 리바, 이자벨 위페르, 알렉상드르 타로, 윌리엄 쉬멜
정보
드라마, 로맨스/멜로 |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 127 분 | 2012-12-19
글쓴이 평점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이제 고작 30대 초엽을 지나고 있는 청년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티비 프로그램 어딘가에서 본 자살 예방 프로그램을 가동할지도 모르겠다. 일단 가까이 다가가서 손을 꼭 잡은 다음,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는 것으로 시작할지도. 


  그런 질문에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인간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 이것은 잘 알려진 대문호 까뮈의 질문이자, 서양 철학의 대세를 이루었던 실존주의 철학의 질문이다. 나는 왜 자살하지 않고 있는가. 왜 자살해야하는가는 자살을 시도하려는 이들의 질문이다. 그렇다면 자살을 시도하지 않으려 하는 이들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필요가 있다. 


  사실, 나는 꽤 이른 나이에 아마도 중학교 2학년 시절부터 인간이 왜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살아가고 있는 환경이란 건 극단적이기 짝이 없었고, 도무지 즐거운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서 근원적인 질문을 자꾸만 던지게 되었던 것 같다. 지금에 와서는 정확히 그 당시의 내가 어디까지 상상을 했었는지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일기 쓰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기에 기록도 없다. 허나 분명히 생각나는 것은 내가 나의 죽음 이후까지 한 번 인생의 궤적을 훑어 보았었다는 것이다. 


  계급적으로 따진다면 나는 가난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존재감 없는 막내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이 땅에서 가난한 최하층 서민이 겪어야 할 이벤트들을 착실하게 모두 겪으며 자라났다. 그런 나에게 미래는 예정되어 있었다. 역시 가난한 최하층 서민으로 사는 것과 조금 더 나은 서민으로 사는 것. 둘 중에 하나였고, 아마도 조금 더 나은 서민 정도는 될 것으로 나의 부모는 '기대'했었다. 하지만 나는 묘하게도 언제나 그런 주변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기대'를 품고 살았었다. 내 삶의 양식부터가 전혀 달랐는데, 나는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들었으며, 초등학생 때부터 단벌이었던 세미 정장만을 고집해 입고 다녔다. 서울에서 배운 표준어를 지방에 가서도 고집스럽게 잃어버리지 않았다. 문학을 공부했고, 고급스러운 삶들을 동경했으며, 세계나 지구 전체에 이바지하는 삶을 목표로 두었다. 그런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자란 환경 속에서는 당연히 없었다. 양 부모 조차 나를 전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품고 있던 삶과 실제 내 삶 사이의 괴리는 천지 차이와 같았다. 당연히 나는 언제나 날개가 꺾였다. 내가 바라는 것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 틀림없을 운명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죽지 않는가. 자문하고 또 자문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 질문은 그로부터 수 십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 2월 움츠리고만 있던 몸을 좀 펴고 싶어서 서울로 나들이를 나갔다가 영화 <아무르>를 보고 돌아왔다. 연애, 결혼, 사랑 같은 단어들에 대해 고민이 많은 요즘이었다. 그 단어들의 마지막 지점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하던 차였다. 영화는 훌륭했다. 담담했고, 격조가 있었으며,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많은 말을 건내고 있었다. 노년의 부부. 병에 걸린 아내.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기 싫다는 아내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집에서 고된 간병 생활을 계속해나가는 남편. 


  <아무르>라는 제목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관을 나서서 길을 걸으며 한참 생각했다. 그것이 단지 '성적인 이끌림에서의 사랑'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닐 거라고 판단했다. 나에게는 영화 <아무르>의 사랑은 곧 우리네 '삶 전체에 대한 사랑'의 의미로 다가왔다. 우리의 삶을 혹은 한 사람의 삶 전체를 사랑하고 존중하고 존경하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던져오는 것 같았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정도.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어떻게 죽을 것인가?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적어도 자기의 삶을 사랑하며 죽어야 한다. 


마지막 순간 자기의 삶을 비참하게 여기며, 자기가 살아온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훼손 당하며 죽는 것은 바람직한 죽음이 아니지 않을까. 물론, 이 평가는 끝까지 생명을 갈구하며 힘겨운 치료의 과정을 견디고 있는 이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나 자신은 <아무르>를 통해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되돌아본 것이다. 죽음의 순간, 내가 내 삶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나는 올바르게 살아온 것이 아니다. 


  외형적인 성공을 이루는 것이 반드시 자기 삶을 사랑하는 방법은 아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반드시 그 사람의 가치를 따지지는 않는 것처럼. 그것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만족의 문제이며, 자기 자신이 자신의 삶과 자신을 얼마나 존중하고 존경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판단 기준은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다. 


  '중2병'이란 말이 유행한다. 1990년대 후반 일본에서 유행했던 개념이 뒤늦게 우리에게 와서 유행하고 있는 것이다. 중2 때의 나는 조금 다른 의미로 병을 앓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병은 꼭 필요한 병이었다. 한 번도 자살이나 죽음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보다 치열하게 죽음의 가까이에 가본 사람이 분명히 더 자기 인생을 깊게 들여다본 사람일 것이다. 정말 죽음에 가까워져서야 '죽음'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면 이미 늦다. 우리는 살아 있을 때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결론으로부터 내 삶을 돌아봐야 한다. 


  내가 중2 때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거나 해볼 수 있다.     


그 이후 내 인생은 아무거나 되든 안 되든 해보는 삶이었다. 바라는 것이 있거나, 꿈꾸는 것이 있다면 무조건 도전해왔다. 망설일 이유도 자격도 나에게는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어차피 죽는다. 또 어떤 이는 사람의 인생은 한낱 여름밤의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따지고 앉아 있을까. 모두의 결론이 '죽음'으로 귀결되는 것으로 똑같다면... 우리는 평등한 '대전제'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이런 낭만적인 언설들과 삶의 실제 모습은 전혀 다를 것이다. 고통스러운 순간이 훨씬 많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닐까. <아무르>의 남편은 아내의 존엄한 인생을 지켜주기 위해 최후의 방법까지 동원한다.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고통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은 참으로 아름다운 고통이다. 역설적으로 고통이 없이는 삶은 절대 아름다워질 수 없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혹은 어떻게 살 것인가. 고통스런 고민을 시작하지 않는 이에게는 삶은 아무런 표정도 지어주지 않을 것이다. 



2013. 4. 10.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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