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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센의 읽기 혁명 - 스티븐 크라센 지음, 조경숙 옮김/르네상스 |
「명사」
「1」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 기초, 사회 제도, 경제 제도, 조직 따위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
「2」이전의 왕통을 뒤집고 다른 왕통이 대신하여 통치하는 일.
「3」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
독서 방식을 법으로 규정한 헌법 조항 따위는 없을 것이므로 우선 1번의 의미는 제외하자. 역시 독서라고 왕조가 역사 속에 존재한 적은 없으므로 2번도 제외. 남은 것은 3번이다. 3번의 의미는 그럴싸하다. 그렇다면 <크라센의 읽기 혁명>이라는 책은 기존의 독서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독서법을 급격하게 제시하는 일을 수행해야한다.
자, 제목을 지은 편집자를 괴롭히는 일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자. 예감하다시피 이 책은 독자에게 새로운 독서법을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 책의 원제는 '독서의 힘'이라는 매우 소박한 제목이며, 그 원제에 알맞는 내용을 담고 있을 따름이다. 언어학자 크라센은 독서를 통한 모국어 혹은, 외국어의 습득 효과가 탁월하다는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교직에 발 한 쪽을 담그고 있는 입장에서는 늘 아이들이 독서를 좀 더 많이 했으면 좋겠다는 부모님들의 요구에 직면하기 때문에 이런 책을 한 두 번쯤 들춰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나는 언제나 부모의 요구 이전에 다음과 같은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대체 왜 아이들에게 꼭 책을 읽혀야 한다는 것인가?
부모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한다. 아이가 소파나 침대 이불 속에 드러누워서 닌텐도 DS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 복장이 터질 것이다. 누구나 아이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 닌텐도 DS가 아니라 빅또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나 제레미러프킨의 <제3의 물결> 같은 것이었으면 하고 바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거꾸로 상상을 해본다. 대체 아이가 어떤 인생을 살고 있기에 초등, 혹은 중등 초반 과정의 아이들이 소파에 앉아 커피를 - 아니 이 경우는 과일 주스 같은 것이겠지만 - 마시며 <제3의 물결>을 읽고 국제 정세에 대해서 고민해본단 말인가. 혹은 <레미제라블>을 읽으며 인간 삶의 비애에 대해 고뇌한단 말인가. 부모들은 대체 왜 어린 아이들에게 그와 같은 가혹한 인생을 부여하려는 것일까.
"읽기는 언어를 배우는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유일한 방법이다."
<읽기 혁명>에서 말하는 크라센의 생각은 반드시 그 형태가 종이로 인쇄되어 제본된 책이 아니라 하더라도 언어로 읽히는 모든 것은 독서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만화책 속에 표현된 인물들의 대사도, 예능프로그램의 자막도, 게임 속에 나오는 텍스트도, 지나치다 보는 광고판 속의 문구들도, 인터넷판 신문의 연예정보도 모두 '독서'의 대상이다. 문제는 작품의 완성도가 아니라 문장을 구성하고 있는 어휘의 수준이고, 어떤 매체를 통해서건 인간은 자연스럽게 보다 고급한 어휘들을 학습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모국어를 외국어보다 '쉽게' 학습할 수 있는 이유다. - 사실 이것은 매우 고된 학습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지만 - 크라센은 이러한 모국어 학습법을 외국어에도 그대로 도입 시킬 때 우리가 보다 언어를 쉽게 습득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러니까 사실 이 책은 우리가 생각하는 '독서'의 효능과는 전혀 다른 것을 목표하고 있다.
인간이 독서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어휘력'뿐만이 아니다. 오히려 더 큰 이득은 독서를 통해서 앞서 산 사람들의 삶을 간접 체험하고, 보다 큰 범위, 보다 더 깊은 사유들을 나눌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허나 크라센의 외국어 학습법을 다룬 도서가 한국에서 <읽기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나온 것은 그 의미를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가 이미 '독서'를 수능 언어영역의 성적을 올려주기 위한 방편 정도로 사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독서는 그저 어휘력 신장의 방편으로 그 지위가 추락하고 만 것이다. 참으로 비참하다.
한국의 국어 교사로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단호하게 말해 책은 '누구나' 읽는 매체가 아니다. 우리는 흔히 독서를 취미라고 말하길 좋아한다. 음악감상, 영화감상, 독서... 뭐 이런 식으로 자신의 우아한 취향을 드러내길 좋아하는 민족이다. 이 부분을 잘 살펴보자. 독서는 취미일 뿐이다. 예를 들자면 야구도 취미의 한 갈레다. 그렇다고 해서 온 국민이 야구를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독서 역시 개인의 취향 중 하나이며 온 국민이 독서를 해야한다고 강요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언어영역 성적을 걱정하는 부모라면 크라센의 '혁명적' 방법을 다시 상기 시켜보길 권한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언어영역을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수능은 언어영역은 어휘력과 언어센스의 전장일 뿐이다. 그것은 굳이 밤새도록 스탠드 불을 켜놓고 책을 읽어야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언어센스는 일정 부분 타고나는 것이지만, 어휘력이야 굳이 책이 아니라도 언어로 된 것을 읽기만 하면 자연스레 획득할 수 있다.
부모가 자녀에게 어떤 취미를 강요한다는 것도 나로선 썩 달갑지 않지만, 자녀에게 "야, 이 웬수야, 책 좀 읽어라!" 고 다그칠 때는 그 목표의식을 스스로 분명하게 할 필요는 있겠다. 독서 취미를 갖기를 바란다면 그런 방식으로는 아이는 영영 책을 읽는 취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 강요되는 취미라는 말은 논리적으로도 설명되지 않으니까. 언어영역 고득점을 받아라! 라고 외치고 싶은 거라면 표현을 바꿀 필요가 있겠다. "야, 이 웬수야 어휘력 좀 길러라!" 정도가 어떨까.
나로 말하자면 책을 그닥 많이 읽는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울컥 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독서를 '취미'로 가진 독서가들에 비하자면 나는 이제 막 독서초등학교에 입학한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정녕 독서를 '취미'로 하는 아이를 보고 싶다면, 아이가 독서유치원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을 보며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부모라면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해드리고 싶다.
그러니까 먼저 독서유치원에 입학하세요.
동서고금의 모든 위대한 선지자들이 이 방법을 추천했지만 아직까지 이 방법이 전부모적인 독서운동으로 확산되었다는 통계는 본 적이 없다. 그러니 파피루스에서 '책'이라는 것을 만들어낸 이례로 수 천년 동안 부모들이 오매불망 자녀의 '책 읽는 모습'만을 꿈에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2013. 4. 23.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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