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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점
오정희 지음/문학과지성사





새장 속에서 윤회하는 우리들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소박하면서도 힘이 있는 새의 그림에 반했다. 새를 갑갑하게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네모 칸들이라든지, 붉은 색으로 촌스럽게 새겨져 있는 제목은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새."


라고 제목을 발음하며 시집 크기의 이 소설책을 집어 들었을 때, 나는 꼭 작고 흰 새를 들어 올린 듯한 느낌이었다. 표지의 그림은 돌아서려는 나의 몸을 자꾸만 잡아 당겼다. 나중에 그 그림이 그 유명한 피카소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서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종종 책의 내용보다 표지가 마음을 끄는 경우가 있다. 그 경우 표지의 아름다움을 글이 뛰어넘지 못하면 실망이 배가 되곤 했다. 비록 유명하지 않은 소묘작품이라지만 피카소의 작품을 얼굴로 삼은 오정희의 소설 『새』는 그의 무게를 견뎌낼 수 있을까. 책을 펼쳐들고 한 자 한 자 읽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곧 나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오정희의 소설에 대해 평론가들은 종종 난해하다거나 쉽게 읽히지 않는다는 식의 표현을 쓴다. 그 평론가들은 그만큼 오정희의 작품이 수준이 높다는 의미로 그런 표현을 쓴 모양이지만 오히려 그런 칭찬은 작품을 독자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한 요인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대중들이 재미있다고 하는 <조폭 마누라>를 보러 가지, 평론가들이 예술적 완성도가 높다고 평하는 <박하사탕>을 더 보러 가지는 않는다. 평론가들의 호의가 오히려 작품의 판매에는 악의가 되는 불상사가 종종 일어나는 것이다.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하다. 나는 당당하게 오정희의 작품이 쉽게 읽히면서도 매우 재미있다고 선언한다. 


  특히 오정희의 첫 장편인 『새』는 저물녘 노을의 냄새와 어슴새벽 공기의 촉감을 느낄 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서늘한 바람이 154페이지의 곳곳에서 씽씽 불어대는 『새』는 독자 자신을 조그만 새로 만들어 버리고, 작품을 읽는 내내 위태로운 비행을 하게 만든다. 


 "오래오래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탔다. 강물 위의 긴 다리를 건널 때 강물이 시퍼렇게 우우 일어서며 따라와 기차를 덜컹덜컹 흔들었다." -7P-


도입부에 들어 있는 이 문장에서처럼 글을 읽는 동안 강물이 시퍼렇게 우우 일어서며 나를 따라오는 듯 했다. 


  오정희의 작품은 종종 동화 같은 느낌이 난다. 동화라고 하면 어린이들을 위한 어여쁜 이야기 정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동화는 결코 어여쁜 이야기가 아니다. 동화란 결국 어린이들에게 인생의 쓴맛을 조금은 달게 맛보여 주기 위해 고안된 또 하나의 소설이다. 동화 속의 이야기를 지배하는 것은 사실은 '공포'이다. 어른들은 공포를 통해 아이들을 가르친다. 낯선 사람의 침입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인 백설공주는 독이 든 사과를 먹고 가사상태에 이르고, 여름에 일하지 않고 신나게 놀기만 한 베짱이는 겨울에 왕따를 당해 얼어 죽으며, 거짓말에 재미를 붙였던 양치기 소년은 늑대에게 뜯어 먹힌다. 위의 열거한 동화들은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 근면, 정직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서슴없이 주인공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공포를 통해 아이들을 사회가 원하는 모습으로 길들여가는 것이다.  


  오정희의 『새』역시 그런 류의 공포가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단지 일반 동화와 다른 점이라면 그 대상이 어린이를 향한 것이 아니라 어른을 향해 있다는 점이다. 『새』는 어린이를 공포로 몰아넣는 어른에게 경고를 보낸다. 우주에서 가장 예쁜 사람이 되라고 지었다는 ‘우미’, 우주에서 제일 멋진 남자가 되라고 ‘우일’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소설의 주인공 남매는 마치 동화 속의 주인공 같다. 동화 속의 주인공들은 종종 우주에서 가장 예쁜 공주이거나, 우주에서 제일 멋진 왕자가 아니던가. 동화의 주인공들은 그 배역에 걸맞게 예쁘고, 멋진 모습을 보여주지만 『새』의 우미와 우일은 오히려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망과 현실이 어긋나고 있다. 날아가고자 하는 새의 속성과 그것을 좌절시키는 새장이라는 현실의 공간처럼. 


  우미와 우일은 그 이름처럼 미래의 가능성을 가진 어린이들이다. 하늘을 마음껏 날아갈 가능성을 지닌 작은 새이다. 그러나 그들이 새장에 갇혀서 자라나게 된다면, 새장을 치운 후에 그들이 과연 하늘로 날아오를까. 오늘날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아이들에게 푸른 하늘일까, 그저 푸른 색을 칠한 새장일까. 우일과 우미의 엄마는 남편의 잦은 폭행 때문에 집을 나간다. 여성주의적으로 읽어서 오누이의 아빠를 비판하고 남성 가부장제 사회에 희생된 아이들의 모습을 그렸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겠으나, 오정희는 『새』에서 오누이의 엄마나 아빠에 대해서 개별적으로 비난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러한 환경 자체가 문제시 될 뿐이다. 그렇지만 또 그 환경이라는 것에 가부장적 환경이라는 요소도 분명히 포함되는 것이리라. 


  오누이의 아빠는 아이들을 친척집에 맡겨두고(버려두고 라는 표현이 더 알맞겠지만) 돈을 벌러 떠나서 새 여자를 사귄다. 그 사이 친척집을 전전하며 오누이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며 자라난다. 그 사이 우미는 잡지나 달력 따위에서 예쁜 여자의 얼굴을 오려내는 취미를 갖게 되고, 우일이는 '우주소년 토토' 라는 만화에 빠져든다. 우미가 예쁜 여자의 얼굴을 자꾸만 도려내는 것은 기억 속에서 점점 스러져가는 엄마의 이미지를 붙잡아 두기 위해서 였으리라. 우일이가 열광했던 우주소년 토토는 우주의 괴수들과 싸우는 용사이다. 그러나 우주에서 태어나 큰 힘을 부여받은 토토는 그 대신 영혼을 부여받지 못했기에 눈물을 흘리면 죽어버린다는 설정이다. 남자 아이에게 힘이 센 영웅이 등장하는 만화는 빨리 성장해서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을 투사하는 매체이다. 그런데 과연 누가 아이들에게 어서 자라서 강해져야 한다는 욕망을 심어준 것일까? 사나이다워야 한다, 울지 말아야 한다, 강해져야 한다... 이 말들은 모두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너는 어서 어린이가 아닌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른이란 울지 않는 강한 존재라는 걸까. 부모라는 교육의 초보자들은 종종 자기가 할 수 없는, 하고 있지도 않은 일을 아이들에게 강요한다. 가령 항상 정직하라거나, 늘 명랑하게 지내라거나 하는 따위의 불가능한 일을 아이들에게 요청한다. 마치 어른들은 다 그렇게 산다는 양. 그러나 어른이 된 우리는 이제 진실을 안다. 어떤 어른도 세계 최강이 아니고, 눈물이 마르지도 않았다는 것을. 어째서 우리는 이룰 수 없는 것을 당연한 일처럼, 습관적으로 어린이에게 요구하는 건가. 과연 성장이란 무엇인가? 


  류시화의 시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새는 앞을 향해 날아간다. 헬리콥터처럼 뒤로 날아갈 수는 없다. 성장이란 말도 같다. 성장은 어딘가 한 방향으로 전진해가는 것이다. 방향을 꺾으면 퇴보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새는 어디로 날아가는가. 새는 늘 좋은 곳으로만 날아가는가. 새에게 좋은 곳과 우리가 보기에 좋은 곳은 큰 차이가 있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디로 성장해 가는가. 우리는 과연 좋은 방향으로 성장해 가는가. 우리에게 좋은 곳과 우리를 보고 있을 또 다른 생명체, 혹은 절대자에게 좋은 곳은 큰 차이가 있지 않을까. 오누이와 함께 살게 된 아빠의 애인은 감자  눈을 파내면서 우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모두 매일매일 무엇인가가 되어가는 중이지. 너는 지금의 내가 되기 전의 나야. 아니면 내가 되어가는 중인 너라고 말해야 하나? 그래서 나는 너희들을 보는 게 무서워 견딜 수 없어."


  어린이는 자라 결국 어른이 된다. 우리가 네버랜드에 살고 있지 않은 탓이다. 어린이는 어른들의 요청에 따라 혹은 포장된 어른의 이미지에 현혹되어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아이들은 모두들 자라기 위해 필사적이다. 어른이 되어버린 어린이들만이 그것을 잊는다. 어른인 아빠의 애인이 어린이인 우미를 보며 공포를 느낀다. 여자의 예언처럼 우미는 그런 아빠 애인의 모습을 점점 흉내 내며 성장한다. 어른은 어린이가 어른이 되어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어린이는 어른이 되는 것을 동경한다. 여기서 각각 쓰인 어른이라는 단어는 사실 같은 의미가 아닐 것이다. 어린 새는 자기가 자라 날개의 힘이 세어지면 새장을 뚫고 푸른 하늘로 날아갈 수 있을 거라 상상한다. 그러나 이미 어른이 된 새는 자기의 몸집만 커지고 새장은 그대로임을 알게 된다. 커진 몸집 때문에 새장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오히려 더 답답하게 숨이 막힌다. 괴롭다. 어른이 된 이들은 알게 된 것이다. 우리가 저 창공에서 태어나 이 새장 속에 갇힌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애초에 새장 속에서 태어났음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무대가 이 감옥 속이라는 것을. 어른이 된 어린이들은 절망하고 부질없는 꿈을 품는 어린이들을 조소한다. 자기와 똑같은 절망을 겪을 어린이들에게 슬픔과 공포를 함께 느낀다. 우리는 이 새장 속에서 태어나 새장 속에서 죽고, 새장 속에서 윤회한다. 


 "세상에 한 번 생긴 것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해준 것은 연숙아줌마이다. 아주 먼 옛날의 별빛을 이제사 우리가 보는 것처럼 모든 있었던 것, 지나간 자취는 아주 훗날에라도 아름다운 결과 무늬로, 그것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나타난다. 부드럽고 둥글게 닳아지는 돌들, 지난해의 나뭇잎 그 위에 애벌레가 기어간 희미한 자국, 꽃지는 나무,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고 그 외로움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바람은 나무에 사무치고 노래는 마음에 사무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밤새 고이고 흐르던 세상의 물기가 해가 떠오르면 안개가 되고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다시 내려서 땅속 깊이 뿌리 적시는 맑은 물로 흐르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고, 강물이, 바닷물이 나뭇잎의 향기로 뿜어지고 어느 날의 기쁨과 한숨과 눈물이 먼 훗날의 구름이 되는 거라고 말했다." -75p-


  불편한 몸 때문에 거동조차 힘든 연숙아줌마는 그럼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낭만적인 꿈을 가지고 살아가며, 남편인 김씨아저씨와 원앙금슬이라 불리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런 연숙아줌마에게는 윤회조차 고통이 아니며 아름다운 것이다. 어른이지만 아직 어린이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비록 새장 속에 태어나 평생을 새장 속에서 살 수밖에 없지만 저 하늘을 날아갈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불행한 것만은 아니다. 푸른 하늘이라는 무한대의 자유는 어쩌면 무한대의 외로움과 맞닿아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상상하는 새가 아닌 현실의 새는 자유나 평화를 위해 하늘을 날지 않는다. 그들은 먹이를 얻기 위해 날아다니고, 따뜻한 보금자리를 얻기 위해 쉼 없이 날개를 펄럭거린다. 돌아갈 곳이 없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라 할 수 없다. 과연 저 창공을 가르는 새들에게 온전한, 그리고 영원한 그들의 보금자리가 있을까. 현실의 새들은 늘 바람처럼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이곳으로 흘러 다닌다. 그렇게 흘러 다니다 낙오된 새들은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개천둑의 마른풀 사이에서 새를 보았다. 죽은 새였다. 주워드니 깃털이 보르르한 새는 아주 가벼웠다. 손바닥에 바람이 한줌 얹힌 것 같았다. 발가락은 가느다란 철사처럼 날카롭게 오그라들었고 먼지와 흙으로 더럽혀진 털 속 깊이 민들레씨처럼 개미들이 기어들고 있었다." -93p-


  우일이는 하늘을 날다 떨어져 죽은 새를 보고 이씨아저씨가 새장 속에서 자기 아내처럼 기르고 있는 새 같다고 말한다. 그런 우일이에게 우미는 바보 같은 소리라고 핀잔을 주며 새를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던져버린다. 우일이는 계속 '우주소년 토토'의 세계에 머물러 있지만 우미는 계속 변화한다. 그 변화를 감히 성장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우미는 새장 속에서 사랑 받으며 자라고 있는 이씨아저씨의 새와 먹이를 찾기 위해, 혹은 보금자리를 찾기 위해 날아다니다 죽은 새의 차이를 안다. 그러나 우일이는 그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우일이는 여전히 새장 밖의 일만을 생각한다. 자기가 이 새장을 벗어나 우주소년 토토 같은 강자가 되어 세계를 흔들어 볼 수 있으리라 여긴다. 그에 반해 우미는 새장을 벗어나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 부질없음을 안다. 오히려 새장 속에서 사랑을 받으며 사는 쪽이 더 행복할 수도 있다고 여긴다. 나는 우미와 우일이, 둘 중 어느 쪽이 더 옳다고 판단할 수 없다. 새장 속의 삶에 적응하는 것과 새장 밖의 삶을 꿈꾸는 것. 어느 쪽이 더 올바른 삶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우리는 대부분 새장 밖의 하늘을 날아 본 적이 없는 까닭이다. 설혹 새장 밖의 하늘을 날아봤다고 쳐도 자기만의 체험으로 얻은 주관이 정답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철길을 따라 날마다 조금씩 멀어져가던 김씨아저씨가 마침내 돌아오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어둠을 무서워하는 연숙아줌마가 누워서도 불을 켤 수 있게끔 형광등의 줄을 길게 늘어뜨려주었다. 살아가자면 누구나 그런 일쯤, 어둠을 몰아내는 일쯤은 혼자 할 수 있어야 한다." -120p-


  우미는 연숙아줌마보다 먼저 어른이 되었다. 연숙아줌마도 곧 혼자서 어둠을 몰아내는 일쯤은 할 수 있게 되겠지. 우리는 비록 새장 속에서 태어나 어떤 정해진 틀 속에서 성장하지만 평생 이 새장 속에서만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더러는 이 새장을 벗어나 저 푸른 하늘의 날아오르는 경험을 하는 이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저 저 새장 밖의 세상을 동경하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이 새장의 문을 여는 법과 새장 밖의 무한대의 자유에 질식하지 않도록 외로움을 견디는 법, 어둠을 몰아내는 법을 익혀야 할 것이다. 우리는 보통 성장이라는 말을 우리가 태어난 새장의 생활에 적응해가는 과정으로 여기지만, 이 새장의 문을 여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 새장의 문을 여는 법은 무엇일까. 그건 어쩌면 연숙아줌마가 말한 윤회의 이야기에 힌트가 있지 않을까. 우리가 살아온 이 새장 속에서의 신산한 삶을 잊지 않는 것, 작고 작은 이야기, 연약한 존재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우리가 비록 지금 이 생에서 이 새장의 문을 열지 못하고 스러지더라도 그 삶의 과정은 지워지지 않고 다음 생으로 다음 생으로 아름다운 결과 무늬로 그것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나타남을 믿는 것. 그렇게 윤회의 윤회를 거듭하다보면 언젠가는 우리의 한숨이 한 조각 어여쁜 구름이 되듯 우리네 새장 속의 세계와 저 밖의 푸른 하늘의 경계가 사라지고 자유와 사랑을 함께 누리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우리의 아이들은 더 이상 어른이 되도록 강요받지 않아도 좋고, 그저 모두가 아이로서 살아도 괜찮을 그런 네버랜드가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새』의 마지막 대목에서 우미는 잊어버렸던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다.


 "우일아, 우미야. 누군가 부르는 듯한 소리에 뒤돌아보았다.'''''' 우주에서 가장 예쁜 사람이 되라고 우미라고 이름짓고 우주에서 제일 멋진 남자가 되라고 우일이라 이름지어 그렇게 부르던 목소리가 있었다. 그렇게 부르던 마음은 이제사 내게로 와 들리는가보다." 

-153~154p-


  우리는 모두 '새'로 태어났다. 우미도 우일이도 '새'로 태어났다. 새장 속을 날던 새장 밖의 하늘을 날던 우리는 어딘가를 향해 한 방향으로 날아간다. 우리는 그것을 이름하여 성장이라고 부른다. 날아가며 자꾸만 과거를 돌아보며 고개를 꺾으면 새는 목이 부러져 죽는다. 우일이는 자기 앞의 생을 마주하지 않고 자꾸만 고개를 돌렸다. 허나 우미는 자기 앞의 생을 마주하며 오히려 과거를 자기의 현재로 불러들였다. 과거로 걸어가는 사람과 과거를 걸어오게 하는 사람은 다르다. 과거와 현재, 새장과 새장 밖. 우리는 이러한 개념들을 흔히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선택의 문제로 다루려 한다. 그렇지만 정말 성숙한 방법은 그런 것들을 나누고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양자 사이의 소통의 문을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분절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어쩌면 우리가 인위적으로 잘라놓은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정말 과거와 미래가 있는가, 정말 새장과 새장 밖이 따로 존재하는가. 과거의 목소리가 현재에 들려오기도 하고, 미래의 일어날 일들이 과거에 이미 겪었던 일들의 리플레이가 되기도 한다. 인도에서 죽은 이가 한국에서 태어나기도 하고, 한국에서 죽은 이가 아프리카에서 태어날 수도 있다. 모든 것은 그렇게 윤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참 성장이란 그렇게 모든 것이 서로서로 이어져 있음을 이해해가는 과정이리라. 새장과 새장 밖을 따로 여길 것이 아니다. 새장에 커다란 문을 내어 하늘을 날 수도 있고, 집으로 돌아올 수도 있는 그런 세계. 새장 속의 어른이 되어버린, 혹은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우리는 또 다른 우일이와 우미를 위해, 그리고 우리의 어린 날들을 위해 자기 몫의 어둠을 몰아내고 새장의 문을 여는 법을 계속 고민해 가야 할 것이다. 



2006. 9.20. 멀고느린구름




뱀발(蛇足): 사람들에게 잊혀 가고 있는 이 작품이 다시 빛을 볼 수 있도록 문학과지성사에서 재판을 내주었으면 좋겠다. 재판을 낸다면 조금 더 예쁘게 책을 꾸며서 만들어 주기를 바란다. 피카소의 푸른 비둘기를 원색 그대로 하여 책 전면에 싣는 것도 좋겠다.(네모 칸이나 어색한 파스텔 칠은 빼고, 제목의 폰트도 좀 예쁘게 만들어서.) 아니면 피카소의 아래의 그림을 표지로 삼는 것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 피카소의 초기작 '비둘기를 안고 있는 아이'이다. 정말 오정희의 『새』와 딱 어울리는 그림이지 않는가! 왠지 우미는 저 아이와 닮았을 것만 같다.


* 하지만 2013년 현재... 재판은 얼토당토 않은 표지로 나오고 말았다...


<비둘기를 안고 있는 아이> 파블로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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