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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남은 문과대 203호 강의실에서 그녀를 만났던 때를 아직도 기억했다. 두 사람은 같은 학과였고, 같은 과목을 신청했으며, 같은 조가 되었고, 공교롭게도 첫날 앉게 된 자리 역시 서로의 옆자리였다. 그남은 그녀를 본 바로 그 순간 사랑에 빠졌다. 놀랍게도. 하지만 누구에게 반하기를 잘하는 성향이었던 그남은 그녀 역시 그남이 반한 여자들 중의 하나가 되리라고만 여겼다. 그녀는 그남에게 호감을 가졌으나, 반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누구에게 반하기를 잘하는 성향이 전혀 아니었다. 그남은 친구 관계를 가장해 그녀에게 접근했고,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그남을 부담스럽게 여겼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지 1년만에 두 사람은 절교를 했다. 사실, 절교란는 단어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두 사람은 절교를 할만큼 돈독한 사이라고 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1년이 지나 그남은 제2의 그녀를, 그녀는 첫 남자를 만나 연애를 시작했다. 두 사람의 연애시대는 순조롭게 시작되는 것 같았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남은 제5의 그녀까지 만났지만 그녀를 마음 속에서 영영 지울 수는 없었다. 그녀는 첫 남자와의 헤어짐 이후 다른 남자를 만나보지 못했거나 않았다.
“다 먹었다.”
그녀가 포크와 스푼을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갈까?”
그남이 알아채고 물었다.
“응.”
그녀는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때 웨이터가 자리로 와서 후식을 무엇으로 먹겠느냐고 물었다.
“먹을래?”
그남이 물었다. 그녀는 한 손에 챙겨들었던 가방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 두 잔. 커피가 나올 동안을 또 기다려야 했다. 그남은 이때 꽃다발과 케이크를 가지고 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녀에게 화장실에 잠시 다녀오겠다고 하려는데.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그녀가 유리창 쪽을 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유리창에 하얀 시트 스티커로 시 한 편이 붙여져 있었다. 강은교, 사랑법.
“좋다, 이 시.”
어두웠던 그녀의 표정에 희미한 빛이 돌기 시작했다.
“응, 그러네.”
“어떤 구절이 맘에 들어?”
“방금 네가 말한 그거.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정말?”
“정말!”
그남은 힘주어 답했다. 그녀는 다른 구절도 읊조렸다.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
“침묵할 것...”
그남은 마지막 부분만 같이 따라 읽었다. 그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넌 좀 침묵하지마 그만.”
그남도 따라서 피식 웃고 말았다.
“알았어. 침묵은 그만~”
그남은 지금이야말로 선물을 가져올 때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핑계를 대고 자리에서 일어나 음악당 쪽으로 뛰었다. 로비에 있는 물품 보관소에서 맡겨두었던 꽃다발과 케이크를 받았다. 자켓 안주머니 속에 넣어둔 특별 선물도 손으로 만져보았다. 가슴이 뛰었다. 정식으로 그녀에게 생일 선물을 주는 것은 10여년만의 일이었다. 그녀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레 모짜르트의 문을 열고 들어서 그녀가 앉은 자리로 옮겨 갔다. 그녀는 그남이 가까이 다가오는 줄도 모른 채 유리창에 쓰인 시 읽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2012. 6. 4.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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