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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사랑이라는 숙제

멀고느린구름 2018. 8. 11. 08:46

10여년 전의 일이 있은 뒤부터 내게 사랑은 행복이 아닌 숙제였다. 그러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어리석게도 최근의 일이다. 인연을 만나고 마음을 나누며 때때로 즐거웠으나 안온함이나 충만한 기쁨을 느낀 일은 드물었다. 상대는 충분히 훌륭하고 좋은 사람인데 어째서 나는 편안해지지 못할까, 외로움을 떨치지 못하는 걸까 고민하게 되는 날들이 많았다. 


더 어리고 미욱할 때는 그 모든 것을 상대의 잘못으로 돌려버리곤 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나와는 맞지 않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나를 지키려는 비겁함이었다. 좀 더 어른이 된 뒤에는 '내게 알맞는 사람'은 애초에 없는 것이고, 마음을 준 사람에게 최대의 정성을 다하는 것이 그저 사랑이 아니겠는가 했다. 20대 초반 어리석은 사랑이라고 비판하고는 했던 희생적인 사랑에 뛰어들어 본 것이었다. 


상대의 행복을 나의 행복처럼 여기고, 상대의 성장을 나의 성장이라 여기며 살아보니 과연 해롭지 않았다. 때때로 이기적인 본성이 나를 휘둘렀으나, 애써 누르고 오로지 상대의 마음만을 쫓아 수년을 살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때때로 즐거웠으나 외로웠다. 종종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꼈고, 점점 나도 모르는 불만들이 마음 속에 가득 쌓이고 말았다. 20대 시절 내가 스스로 비판했던 그대로가 되고 말았다. 헌신적인 사랑이라고 포장했지만, 사실은 나 자신의 희생을 무의식 속에 교묘히 카운트하며 살고 있었을 뿐인 것이다. 


사랑은 과연 사람을 행복으로 이끄는 것일까. 

현실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면 그다지 그렇지 못하다. 그럼에도 여러 사람들은 사랑에 목마르다. 그것이 대체로 콜라나 사이다 같은 것임을 알면서도. 


돌이켜보면 오랜 세월 시험을 치르듯이, 못다한 숙제를 하듯이 사랑을 했다. 내가 얼마나 기쁜가, 만족하는가 보다는 늘 상대의 평가, 상대의 만족도를 신경쓰며 하루하루 언행을 가다듬으려고 애썼다. 새로운 인연이 다시 시작 될 수록 점점 흠 잡힐 일은 전혀 하고 싶지 않다는 집념에 사로잡혔다. 완결성에 집착하는 성미 탓에 거꾸로 나의 그런 행위는 상대방이 나를 대하는 모습에 대한 잣대가 되고 말았다. 


"나는 이렇게 하는데 저 사람은 왜 그렇게 하지 않지?" 


라고 속으로 자꾸 반문하게 되었던 것이다. 반문을 지우려고 노력하면서도 사실은 반문을 반복했다. 그래서는 20대 때와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셈이다. 참으로 절망적인 일이다.


나는 과연 행복해지고 싶다는 마음으로 사랑을 시작한 적이 있었던가. 상대의 행복을 나의 행복으로 삼자는 다짐도  좌절로 나타나고 만 이 시점에 과연 나는 다시 어떤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이제는 조금 이기적인 마음으로 내 필요를 채워주는 사랑을 해야 할까. 그래서는 무한한 반복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애초에 내 삶에 사랑이 필요한가? 


여러 질문들이 쌓여가고, 답은 미뤄진다. 


10여년 전의 은원 때문에 괴로워한 시간들이 길었다. 하늘이 나를 벌하는 것일까. 내가 아직 깨닫지 못한 죄가 더 가득 남아 있는 것일까. 너무 건방지게 살고 있었던 걸까. 역시 더 살아서는 안 될 인간이었나. 타고난 본성은 어쩔 수 없는 것이려나. 스스로 갖가지 괴로움을 만들어내다가 최근 문득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그저 퇴근 길에 우연히 떠올린 생각이다. 

지난 10여년 간, 나는 늘 기도해왔다. 차라리 나는 파멸에 떨어져도 좋으니, 그가 행복하게 해달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염원했다. 아, 하늘이 소원을 들어준 것이었다. 나에게 벌을 주기만 한 것이 아니었구나. 


그렇게 여기니 오래 묵은 먹구름 한 장이 걷히는 기분이었다. 가려져 있던 달빛 한 줄기가 가까스로 새어드는 느낌이었다. 무척 오랜만에 나도 행복해지고 싶다고 솔직한 마음을 슬며시 떠올릴 수 있었다. 나 같은 놈은 너무 행복해져서는 안 된다고 뺨을 때리는 녀석이 내 마음 속에 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세월이 길었다. 오히려 내 작은 행복을 떠올려보고 나니, 그의 일들을 겨우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게 되었다.


10여년 정도 마음을 다해야 겨우 은원 하나의 실마리가 풀리는 게 인생이구나 싶다. 사랑에도 그만큼의 긴 세월이 필요한 것일까. 그만 마음을 쉬게 하고 싶다, 누이고 싶다는 마음과 그럼에도 다시 도전해볼까 하는 마음이 교차한다. 


그러나 '도전'이라니... 사랑이 과연 그런 것이었던가. 

여전히 나는 사랑이라는 숙제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2018. 8. 11.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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