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소동 탓에 김광석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가 아이유 에 수록되지 못한 것은 여전히 아쉽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는 내 노래방 넘버 중에서도 특히 아끼는 곡 중 하나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나는 옛 인연을 잊으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아 왔던 것만 같다. 오히려 반대로 잊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유년시절 이웃집 여자아이가 선물했던 작은 지우개조차도 아직 내 서랍 속 어딘가에 놓여 있다. 나는 왜 모든 것을 끈질기게 기억하고자 했을까. 아마도 잦았던 이사와 전학의 경험 때문이 아닐까 싶다. 친구를 길게 사귀지 못하고, 늘 헤어짐을 반복하다 보니, 내 마음에는 늘 지금의 사람들이 아닌 지난 날의 그 사람들이 머물러 있었다. 그 습관이 한참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 생각이..
2021년의 첫 글을 써볼까나 하는 비장한 각오로 자리에 앉았는데, 특별히 할 말이 없다. 어제의 아침과 오늘의 아침은 물론 다른 아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떠오르는 태양의 이마 위에 2021이라고 숫자가 써있거나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세월의 흐름에 심드렁한 나라도 떠들석한 세상의 분위기에 하루 정도 동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작년과 재작년에는 새해를 맞아 산에 올랐다. 올해에는 아무런 계획이 없다. 바다를 보러 갈까 하고 잠시 생각했다가 강원도 일대 바다를 모두 통제한다는 기사를 본 뒤, 나도 모르게 그 아이디어 자체를 까먹고 말았다. 덕분에 아주 평범하게 구름정원에 앉아서 언제나처럼 새벽 어스름을 헤치고 붉은 해가 떠오르는 걸 커피와 함께 감상 중이다. 음악은 중세시대에 유행했다..
'별은 빛나건만'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고 싶어 별을 보러 나갔는데, 새벽 하늘엔 먹구름뿐이었다. 멀리 산기슭 마을에서 점점이 빛나는 불빛들만 물안개로 경계가 지워진 새벽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풀이 죽은 채 거실로 돌아와 수년 간 식탁으로 쓰던 간이 집필책상 앞에 앉았다. 별을 보지 못한 탓에 쓰려던 말도 모두 우주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별 수 없이 시간을 차례로 거슬러 오래된 내 블로그에 쌓인 글들을 읽어내려갔다. 최근 2년 사이에는 제대로된 소설 작품도 없고, 온통 푸념이 섞인 에세이만 가득했다. 글을 쓰던 그 순간순간에는 어차피 나중에 다 지워버릴 글이라고 여기며 썼던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 읽어보니 의외로 나쁘지 않은 글이었구나 싶다. '프로우울러의 사생활' 이런 제목이라도 붙여서 책으로..
오직 자기만의 힘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나는 책 읽기를 좋아했던 아버지와 쾌활하고 낙천적인 어머니가 물려준 유전자의 힘으로 온갖 가혹한 날들을 견뎌왔으니, 태어난 그 자체로 이미 빚을 진 셈인 것이다. 혼자 빈 거실에 앉은 이 순간에도 아침에 떠오른 태양빛이 나를 관통하고, 1897년에 사망한 브람스의 음악이 마음을 위로한다. 문득 아득한 태고의 인간을, 아침이 밝아오거나, 별이 뜨기 시작할 무렵 동굴의 시간을 떠올렸다. 지금의 나와 별반 다름 없는 뇌를 지녔을 10만 년 전의 나, 전생의 나는 어떤 문장들을 머릿속에서 조합해내고 있었을까. 하늘은 여전히 하늘이었을 테고, 들판은 들판이었을 것이다. 꽃은 꽃이고 바람은 역시 바람이었을 그때, 나는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었을까. 멍하니 넋을 놓고 있으면..
2년 간 비바람을 맞아 다 썩어버린 울타리를 지난 가을에야 새 것으로 바꿨다. 이전 울타리로 쓰였던 상한 나무막대 50여 개는 길이가 1미터 80이나 되는 것들이어서 어디다 버리지도 못하고 창고에 넣어두었다. 창고 문을 열 때마다 눈에 밟혔다. 그렇게 몇 달을 보냈다. 어제는 큰 마음을 먹고, 나무막대를 마당으로 다 빼서, 박아두었던 나사들을 모두 뽑고, 하나씩 수거하기 좋은 크기로 부러뜨려 큰 종이상자에 담았다. 두 시간 정도 작업을 하고 나니, 상자 세 개에 나무들을 모두 담을 수 있었다. 곰팡이꽃이 핀 나무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상자 속에 담겨 이별을 감당하고 있었다. 아주 멋진 울타리를 만들었어요. 라며 그 나무들을 처음 보여주었던 이는 이제 다시 만날 수 없을 사람이 되었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모든 삶은 흔들리며 제 자리를 지킨다. 다용도실에 있는 드럼 세탁기는 이사 온 지 2년이 다 되도록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다리 높이를 맞춰 세탁 시 절대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을 해놓아도, 한 번 빨래를 마치고 나면 사방팔방을 돌아다니곤 했다. 이사 오면서 떨어져나간 고무발굽 때문인가 싶어 새로 사다가 붙여도 보았으나 허사였다. 간신히 위치를 맞춰 가장 덜 흔들리는 자리에 세탁기를 놓았다. 그러다가 몇 달 전 주인집 어르신 내외가 아랫 집에 물이 샌다는 이유로 찾아와서 다용도실을 살펴보다가 간신히 맞춰놓은 세탁기를 안 쪽으로 쑥 밀어넣고 가버렸다. 그 자리에 두고 빨래를 돌리니 세탁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신나게 춤을 췄다. 그런데 놀랍게도 빨래를 마친 세탁기는 거짓말처럼 제 자리로 돌아와..
라디오도 좋고, 다락방도 좋다. 두 단어 모두 무척 사랑하는 단어다. 두 가지가 조합이 된다면 최상일 것이다. 내 생애 최초의 개인방은 다락방이었다. 단언컨데 내게 다락방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다락방에는 라디오가 있었다.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한 중학생 무렵, 나는 다락방의 알전구가 희미하게 비추는 주황빛 속에서 방과 후의 대부분 시간을 보냈다. 밤이 되면 빨간 라디오의 안테나를 창 밖의 바다로 향하고, 디제이가 선곡해주는 발라드와 재즈와 클래식 음악을 즐겨들었다. 나는 그곳에서 종종 피터팬이 되는 상상을 했고, 인형 친구들과 세상에 없는 대륙으로 여행을 떠나곤 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만날 수 없는 초딩시절의 풋사랑을 생각했다. 지금까지 쓴 ..
가을이 되면 구름의 표정들이 선명해진다. 가없이 높고 넓은 가을하늘은 구름들의 것이어서, 저마다 생기발랄한 빛을 띠고 창공을 누비는 것이다. 마치 오래 기다려온 긴 여행에 나서는 여행자의 표정 같다. 보랏빛에 가까운 진청색부터 물 위에 살짝 풀어놓은 파랑 물감 같은 연청색까지, 오늘 아침 하늘의 끝과 끝은 해상도 높은 파랑빛으로 가득하다. 그 위에 크고 작은 구름들이 우르르 피어나 지금 창 밖은 만개한 구름의 정원이다. 거실에 앉아 시시각각 스치는 하늘의 행인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구름정원'이라고 붙인 우리 집의 이름을 새삼 자랑스러워하게 된다. 이사 온 후 보낸 한 해는 캄캄한 밤을 비추던 별빛으로 버텼는데, 마음을 조금 비우고 나니 깨끗한 하늘의 풍경이 내 안에 점점 영토를 확장한다. 나는 마치 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