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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는 영원히 그대들 편에

경북콘텐츠진흥원 편 <시대의 바람, 경북역사인물뎐 : 이야기의 힘II>  의병장 신돌석 장군 




누각에 오른 나그네, 문득 갈 길을 잊고서

낙목이 가로누운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노라.

남아 27세에 무슨 일을 성취하랴. 

잠시 추풍에 비껴 앉아 감회를 느끼네. 


신태호, 사람들은 그를 이름 대신 신돌석이라고 칭했다. 세상 천지 어디에나 있는 돌과 같은 평범한 사람이어서 였을까, 아니면 돌처럼 단단한 사내였기 때문일까. 몰락한 향리 가문에서 태어나 가문을 일으키고자 양반 고을까지 찾아다니며 한문을 수학했던 그는 1896년 명성왕후 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일어난 의병 조직, 영덕의진에 가담하여 의성의 김하락 의진과 함께 영해부 공격에 참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물러나게 되었다. 그때 돌석의 나이 19세였다. 그로부터 8년이 흘러 이곳 울진 월송정에 올라 세상의 서글픈 시운을 읊고 있는 것이었다. 


돌석은 8년 전의 의병활동을 통해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전국 각지를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구하고, 기울어가는 나라를 일으켜세우기 위한 뜻을 모아갔다. 동학의 유지를 계승한 손병희, 훗날 대한광복회 대표가 되는 박상진 등을 만나 함께 분노하고, 함께 울었다. 그가 지나다니는 곳마다 그의 괴력에 의해 일본인들이 응징을 당하는 일들이 일어났으니, 민초들 사이에는 ‘신돌석’의 이름자가 널리 존숭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돌석은 월송정 난간에 기대어 민초들이 사는 고을을 내려다보았다. 조선이 세워진 지는 500년이나, 이 땅에 살고 있는 민초들의 핏줄은 저 멀리 2300년 전의 단군에 이른다. 중국에 견주어도 모자라지 않을 우리 민족이 바다 건너 오랑캐에게 침략 당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하늘도 참 무심하다. 시운이 이러한데 조정에서는 임금의 눈을 가리고 사사로이 이익을 탐하는 무리들만이 득시글대니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민초들이 일어나는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호서에서 일어났던 동학농민군의 기개처럼 우리 경북의 민초들도 들불처럼 일어난다면 능히 세상을 흔들 수 있지 않겠는가. 언젠가는 반드시 때가 올 것이다. 그때에는 결코 과거와 같이 실패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돌석은 월송정을 내려가며 다시 한 번 결사항전을 위한 만반의 대비를 하겠노라 다짐했다. 남아 27세, 방랑길의 끝에서 그가 찾은 해답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먼저 이웃 영양에서 스승으로 모시던 김도현이 1906년 1월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내 관군에게 진압당하고 말았다. 비보를 전해들은 돌석은 조용히 눈물을 삼켰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스승을 돕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아직 한파가 몰아치고 있었고, 전열은 가다듬어지지 않았다. 또다시 실패한다면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기고 만다. 한 번 일어난다면 들불처럼 일어나야 한다. 온 산하를 의병들의 함성이 뒤덮을 수 있도록 승전하고 또 승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돌석은 분을 삭히며 봄을 기다렸다. 


1906년 4월, 봄꽃과 함께 영천에서 정순기가 찾아왔다. 자신의 6촌 형 되는 정용기가 영천에서 의병을 도모하고 있으니, 때를 맞추어 함께 일어나자는 것이었다. 돌석은 시운이 찾아오고 있음을 느꼈다. 때가 왔구나. 돌석은 정순기가 돌아간 뒤, 곧바로 거병 채비에 나서, 4월 6일 드디어 의병을 일으켰다. 의진의 이름은 ‘영릉’이었다. 참모장에는 큰 매형인 박수찬, 도선봉장에 한참봉(한영육)이 임명되었고, 처남인 한용수도 의병 속에 늠름한 기개를 발산하며 서있었다. 돌석의 집 부근의 주점 김춘궁 앞에서 열린 거병식에는 반상을 가라지 않고 구국의 일념을 품은 100여명의 민초들이 집결했다. 돌석은 그들 가운데로 나아가 외쳤다. 


“여러분, 대개 거병식이라 하면 양반가의 마당에서 이뤄지는 것이 대부분이라 아실 겁니다. 저도 그렇게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어찌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우리들을 이런 주점 앞에 모이게 했는가 어리둥절하실 겁니다. 여러분, 저는 상놈입니다. 배우다 만 놈입니다. 제가 내세울 거라고는 이 울분에 찬 두 주먹과 이 튼튼한 장딴지뿐입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똑같이 내지를 곳을 찾고 있는 주먹과, 내달릴 곳을 기다리는 다리가 있습니다. 글을 몰라도, 양반이 아니어도, 상놈이든, 천출이든 모두 뜨거운 가슴은 갖고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뜨거운 가슴을 이 주점에서 달래어 오지 않았습니까? 누구든 이곳에서는 뜨거운 가슴을 열어재치고 동지가 되지 않았습니까. 오늘은 그 뜨거움을 진정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기 위해서 여기 모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수 천년전 단군의 피를 이은 한 겨레, 한 식구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들 사이에 신분은 없습니다. 모두 동등한 동지로서 격려하고 의지하며 앞으로 나갑시다. 저 무례한 왜놈들을 이 조선에서 몰아냅시다!”


영릉의병장 돌석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일제히 함성이 터져나왔다. 거리에서 이들을 지켜보던 고을 사람들도 함께 함성을 질렀다. 영덕 복더미 마을에서 조선을 밝힐 커다란 횃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영릉의진의 첫 공격지는 울진 장호동 일본군 기지였다. 돌석은 1890년대부터 일본인의 수탈이 지속되었던 울진 장호동을 일본의 침략 전초 기지로 판단한 것이었다. 돌석은 영릉의진의 전투 훈련을 지속하는 한편, 전투를 위한 전투물자 확보에 매진했다. 당시, 의병에 협조하는 이에게는 엄벌이 처해지고 있었으므로, 돌석은 일부러 민가를 약탈하는 형식을 취했다. 먼저 사람을 보내 후원을 승낙받고 야밤에 기습하여 문고리 하나를 부수고 오는 식으로 자발적 후원금을 모금했다. 


물자를 확보하며 이동하여 울진군 남면 화리시까지 도달했을 때였다. 급작스런 원주 지위대의 습격으로 영릉의진은 일보 후퇴했다. 돌석은 더이상의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해 좀 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자 영양에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4월 30일, 영릉의진은 군수물자 보강을 위해 영양군 관아를 급습했다. 수 백명이 총포를 지니고 사방에서 들이닥쳐 능숙하게 전투에 임하니 관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안동 진위대가 다시 긴급히 파견되었으나 돌석은 이를 이미 예견하고 길목을 막아놓았다. 진위대는 끝내 영양에 당도하지 못했다. 무장을 보강한 영릉의진은 다시금 울진 공략을 준비했다. 진보군에서는 군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육고자에서 소 1마리를 130냥을 주고 구입하여 성대한 회식연을 가졌다. 돌석은 부호들에게서는 후원금을 거두어 들이되, 민초들에게는 결코 거저 얻지 않고 늘 정당한 대금을 지불했다. 영릉의진은 사기를 회복하고 다시 울진을 향해 북진했다. 그 과정에 남쪽으로 향했던 부대가 청송관아를 수복했으나 곧 지위대의 공격으로 패퇴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이 패퇴 중에 돌석의 처남인 한용수가 전사했다. 돌석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군사를 이끌고 목표를 향해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 


5월 8일, 울진에 도착했을 때 삼척의진 김하규 의병장의 수하로부터 급보가 왔다. 자신들도 울진에 당도해 있으니 함께 연합작전을 펼치자는 것이었다. 돌석은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하여 삼척, 영릉의 연합의진과 울진에 거류하고 있는 왜적들 및 관군들 사이에서 치열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연합의진은 분투하였으나 울진 관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아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진격을 멈추고 돌아서야 했다. 


5월 10일, 영해로 돌아온 영릉의진은 산남의진의 의병장 정용기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수습하여 산남의진을 지원했다. 5월 말부터는 다시 울진 공격을 위한 군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돌석은 이번에는 기필코 울진 장호동 일본군 기지를 격파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두 번째 진격의 과오는 울진관군의 전력을 낮게 보았다는 데 있었다. 이에 돌석은 3차 진격에서 곧바로 울진관아를 급습했다. 연합의진 300여명의 의병은 파죽지세로 관군을 공격하여 결국 울진관아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관아에서 무기를 확충한 영릉의진은 최종 목적지인 장호관을 향해 진격하여 기세를 이어나갔다. 영릉의병장 신돌석은 드디어 장호관에 도착하여 왜선 9척을 박살내버렸다. 동지들을 서로를 얼싸안고 환호했다. 바람이 불고 불어 잠시 허리를 숙일지언정 끝내 부러지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풀처럼 민초들이 이루어낸 위대한 승리였다. 평민의병장 신돌석이 이끈 영릉의진의 승전보는 전국 각지에 퍼져나가 유림이 중심이 되었던 의병운동을 민중 전체의 운동으로 확산시키는 일대 계기가 되었다. 


이후 돌석의 영릉의진은 삼척, 강릉, 양양, 간성 등 동해안 일대와 영양, 청송, 의성, 봉화 등 경북 내륙지방 일대를 누비며 급파된 일본군 수비대와 수차례 격전을 벌여 승리하였다. 일본군 사이에는 ‘신돌석’이라는 이름이 공포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듬해 1907년에도 영덕 일대의 ‘일진회’ 등의 친일세력을 소탕하고, 8월에는 경북 영양읍을 재공격하여 일분군 헌병과 관아를 불태우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11월에는 유림 의병장 이인영의 발의로 결성된 전국 의병 연합군 ‘13도 창의대진소’에 영남 의병장 대표로 선출되어, 양주에서 열리는 집결식에 참석하도록 연락받았으나 일본과 관군의 지속적인 방해로 끝내 참석하지 못했다. 대신, 백암산과 검마산 사이의 독곡에 은밀히 주둔지를 두고 경북 지역에서 지속적인 항전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듬해인 1908년, 일제는 대대적인 의병진압에 나섰고, 각종 회유책 및 와해공작, 기습 등을 감행하여 의병세력은 나날이 기세가 꺾여갔다. 그나마 일본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있던 영릉의진마저 영양지역 안동수비대장으로 새로이 파견된 니나가와 소위의 기습에 전력의 절반 가량을 잃었다. 영릉의진은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여 울진, 영양 등지에서 간헐적인 전투를 이어나갔으나, 6월 이후로 의병이 귀순할 시 모든 죄를 면죄해준다는 새로운 ‘귀순법’이 공표되면서 전선을 이탈하는 이들이 크게 늘어나고 말았다. 돌석은 이를 원망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능력이 미치지 못했기에 일어난 일이라 여기고, 훗날을 도모해야겠다 판단했다. 돌석은 항전의 무대를 만주로 옮기고자 결의했고, 최측근만을 곁에 둔채 사실상 의진을 해산했다. 그리고 만주로 이동할 여비를 모으기 위해 동지들을 비밀리에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12월 11일 밤 9시, 눌곡에 도착한 영릉의병장 신돌석은 그로부터 4시간 후인 12일 새벽 1시경 눌곡 상계 골짜기의 붉은 암석 위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현상금을 노린 김상렬, 김상태, 김상호 3형제의 소행이었다. 왜세의 압제에 신음하는 민초들을 위해 분연히 일어난 태백산 호랑이는 서글프게도 그 민초들의 손에 죽고 말았던 것이다. 붉은 암석 위에 쓰러지면서 신돌석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영원히 그대들의 편에 설 것이라고. 영릉의병장 신돌석 장군은 현재 국립묘지 애국자 묘역 131호에 영면해있다.  


2014. 12. 7.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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