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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재편, 진보혁신, 민들레의 이름으로 



민들레와 진보의 재편 



민들레는 우리 들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여러해살이풀이다. 밟아도 밟아도 다시 살아나는 강인한 생명력 덕분에 전통적으로는 민초(民草) '백성의 풀'로 비유되었다. 민들레는 풍매화로서 그 씨를 전파하는 방식이 참 아름답다. 풀씨들이 파란 하늘을 가볍게 부유하는 모습은 봄철에 내리는 진눈깨비와 같다. 사뿐히 땅에 내려 굳건히 뿌리를 내리는 모습은 또 어떤가. 다툼이 없고 부드러우나, 그 결실은 단단하다. 


요즘 새정치민주연합의 혁신안을 둘러 싸고 내부의 분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덕분에 대중들의 관심도 이들을 향한다. 아마 추석 차례상 위에도 이들의 이야기와 함께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마약 투여 사위 이야기가 주로 오르내릴 것이다. 


대다수의 시민들은 여러 진보 세력들이 힘을 합쳐 11월 안으로 새로운 대중정당을 건설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할 것이다. 간간이 보도가 나오고는 있으나 아무래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시선이 가지 않는다. 그만큼 진보 세력이 대중에게 매력을 상실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한편 현재 힘을 모으려는 세력 중에 매력적인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와중에도 힘을 합치자고 모인 세력들 사이의 이견이 쉽사리 좁혀지지 않고 있다는 보도까지 나온다.(* 진보결집 어디까지 왔나이런 상황에서는 시간표에 맞춰 11월에 새 진보 정당을 내놓는다 한들 특별한 사건이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진보는 왜 모이려고 하는 거지?


진보 재편이라는 이벤트가 정치적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 물음에 대한 적극적인 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체 진보는 왜 모이려고 하는 거지?"


진보는 왜 모이려고 하는 걸까. 누구나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건 내년의 총선이다. 힘을 합치지 않으면  아무도 당선권에 들지 못할 것이 뻔하기에 덩치를 키우려는 것 아닌가. 옳은 말일 것이다. 나는 굳이 진보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이 현실적인 필요를 부정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유가 이것만이어서는 곤란하다. 


예전처럼 식상한 수사 몇 마디로 돌파하려는 것도 곤란하다. 뭐 100년 가는 정당을 만들겠다느니, 진보의 가치를 제대로 실현하겠다느니, 원내교섭 단체가 되어 정치판을 흔들겠다느니... 간밤에 인터넷 기사에서 읽어보았던 것 같은 말을 되풀이해서는 아무 효력이 없을 것이다. 


"아, 그래 그래. 내년 총선 때문에 모였구나."


라고 확정적 결론을 내릴 뿐이다. 덩치 키우기 위해 모였다는 소문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소문이 필요하다. 



민들레 풀씨들 


사진 출처 = 레디앙


현재 진보 재편에 참여하고 있는 진보세력은 이른바 4자 연대라고 해서 4개의 세력이 있다.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정의당(옛이름 = 진보정의당) : 심상정 의원이 당대표로 있는 원내 유일의 진보 정당이다. 2012년 총선 당시, 통합진보당의 이름으로 1차 진보통합을 이루었다가 '경기동부연합'으로 불리는 당권세력과 불화를 겪은 후 탈당한 세력이 주축이 되었다. 천호선 전 참여정부 대변인이 당대표가 된 이후 세월호 참사 등의 사건을 겪으며 새로운 일반 시민 대중들이 대거 입당하여 현재는 진보 대중 50% + 구 진보정의당 창당 세력 50% 정도의 비율로 구성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최근 당대표 선거를 거치며 '조성주'라고 하는 청년후보가 던진 미래의 진보 라는 화두가 큰 반향을 일으키며, 과거와 다른 새로운 진보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굳히고자 노력하고 있다. 


국민모임 : 2015년 초 대학교수 등 진보적인 지식인 그룹이 주축이 되어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 창당 선언을 하며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한때 여론조사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의 지지율을 뛰어넘는 모습까지 보였으나 잠시 참여했던 정동영 의원의 관악구 보궐선거 패배로 지지세가 크게 꺾이고 말았다. 게다가 정동영 의원이 관악구 보궐선거를 진행하며 보여줬던 호남 '지역 정치인'으로서의 모습은 국민모임의 진보적 이미지를 구태 지역 정치인들의 모임 수준으로 크게 퇴색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현재 SNS에서 묘사되는 국민모임의 이미지는 호남 기득권 세력의 모임 같은 것으로 크게 오도되어 있다. 이를 바로잡으려는 적극적인 노력도 별로 보이지 않아 그냥 그런 세력으로 굳어져 가는 느낌. 그러나 이미 정동영 의원도 이 단체에 발길을 끊은 듯하고, 호남 지역 정치와도 전혀 관련이 없는 진보 세력이라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진보결집더하기 : 2012년 통합진보당 건설에 참여하지 않았던 진보신당 세력과 오랜 세월 독자노선을 지켜왔던 사회당 세력이 합당하여 만든 '노동당'이라고 하는 정당이 우리나라에도 있다. 진보결집더하기의 '나경채' 대표는 올 초에 진보 결집을 내세우며 이 노동당의 당대표로 당선이 되었다. 이후 노동당의 당대표로서 진보 재편 사업에 참여해 왔으나 재보궐 선거에서의 여러 불협화음을 거치며, 당내에서 진보 재편의 필요성에 대한 강력한 문제 제기를 받았고, 이를 정치력으로 돌파하고자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진보 재편의 뜻을 가진 이들과 함께 당을 나오고 말았다. 진보결집더하기는 본래 노동당에 있었으나, 진보 재편에 참여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사를 갖고 당을 나온 세력의 모임이다. 이들의 정치적 지향은 최근 정의당의 복지국가 건설과 대중성 확장을 중심에 둔 새로운 진보 노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노동정치연대 : 무려 2013년 11월에 결성된 꽤 오래된 정치세력이다. 그러나 정치에 비상한 관심이 있는 나조차도 활동상을 전혀 몰랐다는 것에서 이 정치세력의 현주소를 가늠해볼 수 있지 않을까. 양경규 대표의 이름도 언론에서 본 적이 별로 없다. 민주노동당의 뒤를 잇는 노동자가 주축이 된 노동 중심 정당 건설을 목표로 그 첫발을 내딛었으나 여러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아직까지는 정확하게 그 정치적 지향성과 콘텐츠를 대중에게 공표한 바가 없어 어떤 정치세력인지 좀 모호하다. 노동조합 내에서 결성된 진보 정치 세력으로 새 진보 정당과 노동조합의 연결고리로서 역할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요약이라고 해놓고서 굉장히 길게 써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알아둬야지 않을까 싶은 요점만 써본 것이다. 


그럼,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들은 왜 하나가 되려고 하는 것일까. 이제 이 허약한 민들레 풀씨들의 꿈을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민들레 풀씨들의 꿈, 그리고 민들레의 꿈



내가 보기에 이 네 세력이 공통적으로 꾸고 있는 꿈은 단 하나다. 그 꿈은 바로 유럽식 '복지국가 건설'이다. 노동이 존중 받는 세상, 서민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 진보적 상상력과 자유가 보장되는 세상, 경제의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세상. 이 세상의 오래된 모델은 결국 노르웨이, 스웨덴, 독일, 프랑스와 같은 선진 복지국가이다. 


오랜 세월 우리나라는 '미국'을 지향해 왔다고 생각한다. 무한 경쟁과 자본주의적 가치의 극대화를 통해 아메리칸 드림이 구현되는 세상 말이다. 그러나 그런 미국도 이제 그 한계를 받아들여 아메리칸 드림의 가치를 유러피안 드림과 조화시키려고 하고 있다. 오바마의 뒤를 이어 인기를 모아가고 있는 버니 샌더스는 미국을 유럽식의 복지국가로 만들고자 하는 꿈을 피력하고 있다. 



미국 대선 후보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버니 샌더스 의원



진보 재편의 꿈은 결국 최근의 오바마나 버니 샌더스가 그리려고 하는 그림과 다르지 않다. 


복지를 정책 과제로 앞세우는 것과 복지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복지 정책을 내세우는 것이라면 아시다시피 새누리당의 주특기 아닌가.(실현하는 것은 전혀 별개로.) 복지국가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복지 정책을 강화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정신을 국민의 '복지'에 두겠다는 것이다. 복지의 기본 정신은 '보편적인 삶의 질'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삶의 질을 보장 받도록 하겠다는 것이 복지 제도의 기본 취지 아닌가. 


까놓고 말하자. '복지'는 유럽 사회주의 정신의 유산이다. 반공정신의 광풍에 휩쓸렸던 대한민국 전 세대들에게는 '사회주의'가 무슨 금기어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가 미국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주목 받고 있는 시대다. 사회주의 국가 중국이 세계의 맹주로 떠오르고 있는 시대다. 우리는 더이상 '사회주의'를 금기어로 여기며 기피하려 해서는 안 된다. 똑바로 마주 보고 정확히 간파하여 그 속의 이점을 취해야 한다. 그래야만 변화하는 세계 질서에도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의 정신과 자본주의의 육체간 결합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민들레의 영토 위에, 민들레당을!


진보 재편을 하려는 4자와 그외 같은 꿈을 지닌 모든 세력이 '복지국가 건설'이라는 대명제를 앞에 내걸고 모여야 한다. '진보'라는 이름은 차라리 복지 뒤에 서도 좋을 것이다. 


최근 나온 진보 언론 레디앙의 기사를 보면 정의당이 진보 결집을 할 때, 당명을 정의당으로 유지할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게다가 당대표도 심상정 대표 체제로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하니 참 걱정스럽다. 진보 재편은 그저 '재편'이 아닌, '혁신'의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혁신하겠다고 하면서 기존의 것을 그대로 다 가져가겠다고 하는 것은 가진 자의 욕심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정의당이 기존에 누리던 것을 모두 유지하겠다고 생각했다면 다른 세력들에게 입당을 권유할 것이지, 어째서 굳이 협의 테이블 같은 것을 만들며 서로 새로운 정당으로 통합하는 듯한 쇼를 한다는 말인가. 


총선을 앞두고 당명을 바꾸면 기껏 쌓아올린 인지도 효과가 사라져 문제가 크다는 주장은 전혀 논의할 가치가 없는 핑계다. 왜냐하면 당장 정의당 핵심 구성원 스스로가 2012년 총선 때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의 이름을 버리고 '통합진보당'으로서 13%의 지지율을 얻어냈기 때문이다. 계획대로 11월에 창당을 한다면 오히려 통합진보당 때보다 홍보할 시간과 여건은 더 나은 상황이 아닌가. 물론, 정의당이 일구어낸 5%의 지지율은 소중하다. 그러나 이 5%가 정당명으로 얻어낸 5%는 아니다. 안철수의 새정치연합은 이름을 발표함과 동시에 20%대의 지지율을 얻기도 했고, 정의당과 통합논의를 하고 있는 국민모임도 18%의 지지율을 받았다. 이름을 알리는 것은 오히려 순식간이다. 그 이름이 그에 걸맞는 내용성을 확보하고 있다면 말이다. 몇 년 전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이 해낸 것을 왜 정의당은 할 수 없다고 말하는가.


진보 재편은 진보 혁신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는 새로운 이름의 정당이 탄생되어야 하는 것이 순리다. 최소한 심상정 대표 체제를 유지하고 싶다고 하여도 새로운 정당 하에서 당원들의 의사를 묻는 재신임의 절차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적어도 나는 민들레 풀씨들이 날아와 정의당의 좁은 정원 위에 뿌리를 내리는 것을 보며 가슴이 두근거리지는 않을 것이다. 정의당의 풀씨, 국민모임의 풀씨, 노동정치연대의 풀씨, 진보결집더하기의 풀씨, 그리고 또다른 여러 진보시민의 풀씨들이 새로운 땅에 사뿐히 날아들어 보다 드넓은 민들레의 영토를 개척하기를 기대한다. 


이 참에 새로운 정당의 이름도 제언하고 싶다. 나는 새로운 대중적 진보 정당이 '민들레당'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으면 한다. '민들레당'은 정의당의 당원이나 지지자라면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유시민 작가가 2011년 12월, 트위터를 통해 이와 같은 당명을 제안 받기도 했다고 해서 유명해졌던 이름이다. 민들레당은 정의당 내에서도 번번이 선택받지 못한 소외된 당명이다. 





예전 구 진보정의당에서 당명을 바꾸고자 할때 주로 다퉜던 이름은 '정의당'과 '사회민주당'이었다. 나는 '사회민주당'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진보정의당이 '사민당'으로 이름을 바꾸면 바로 입당을 하겠다고 트위터에서 선언도 했었다. 이후에도 꾸준히 정의당이 사민당이 되기를 소망해 왔다. 대한민국에 '사회민주주의'의 이념만 뿌리내릴 수 있다면 많은 것이 바뀔 수 있으리라 믿었고, 정당이라면 모름지기 지향하는 가치를 당명에 내세워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생각이 바뀌었다. 이념은 더이상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이념은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반으로 가른다. 물론, 내가 생각하기에 사회민주주의는 무척 실용적이고 중도적인 균형잡힌 이념이다. 다만, 받아들이는 사람이 동일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이념이라는 것은 늘 허망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계몽을 해야하는 것 아니냐고 나 또한 주장한 적이 있다. 허나 계몽은 또 계몽하는 자와 계몽되는 자로 사람을 나눈다. 그 속에서 다툼이 일어난다. 


아름다운 것은 다르다. 아름다운 것은 마음을 모으게 한다. 아름다운 것은 자리를 내어주게 만든다. 나는 민들레의 아름다움이, 유연함과 강한 생명력이 진보를 새롭게 표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이 새로운 진보 정당을 '민들레당'이라고 호명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 부드러운 발음, 연상되는 창공의 민들레 풀씨들을 통해 조금은 마음이 평온해지고 입가에 미소가 번질 진보적 시민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정통 유럽의 국가들이 사민당, 노동당, 좌파당을 정당의 이름으로 쓴다고 하여 우리가 꼭 그들의 방식을 따라야 할 필요가 있을까. 민들레라는 이름 속에는 자유, 정의, 평화, 생명, 민중, 여성 등 진보의 가치가 모두 녹아들어 있다. 오히려 우리가 세계 진보 정당명의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되지 않을까. 가장 아름다운 세계 정당명의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는 모습도 문득 떠오른다. 


모쪼록 진보 재편에 참여하는 모든 세력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기를. 복지국가의 꿈 하나만을 가슴에 품은 가벼운 민들레 풀씨가 되기를. 그리고 새로운 민들레의 영토에서 민들레당의 이름으로 아름다운 새 진보의 역사를 시작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2015. 9. 17.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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