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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로키족의 치료사이자 영적 스승인 '구르는천둥'



인디언 교육



7.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기쁨

- 멀고느린구름



"일곱번째는 서로 다름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인디언의 기본 가르침이다. 우리가 삶이라는 길에서 행하는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과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존경에 기초를 둔 것이어야 한다. 위대한 영혼께서는 꽃들이 서로 다른 것처럼 사람들도 서로 다르게 만드셨다. 붉은 꽃도 있고 하얀 꽃도 있으며 검은 꽃, 노란 꽃도 있다. 그 모든 꽃들은 우리가 그것들을 바라볼 때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우리가 다른 종족의 사람들 사이를 걸어갈 때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는 친절과 존경심을 지니고 걸어야지, 그들의 피부색과 국적을 이유로 미워하거나 거짓말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을 볼 때 우리는 오직 아름다운 것들만을 생각해야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다르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똑같이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그건 결국 백인들의 선전일 뿐이다. 그런 거짓말을 믿지 말라. 창조주께서는 우리를 서로 다른 색깔로, 서로 다른 민족으로 만드셨으며, 그것이 그분께서 우리에게 원하셨던 것이다. 똑같은 힘으로 우리 모두를 이곳에 존재하도록 내려보내셨다. 우리 모두는 꽃들처럼 살아서 활짝 피어나도록 창조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각양각색으로 이 지구에 속해 있으며, 서로 사이좋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세상 사람 모두가 다 똑같이 생겼다면 그 얼마나 지겹겠는가 말이다."


- 구르는천둥, <구르는천둥이 말하다(*국내 번역본은 '우르릉천둥'으로 표기됨.)> 359 ~ 360쪽 중에서 - 



최근 한 기사를 보고 역시나... 하고 생각했던 것이 있다. 기사의 내용은 아시아 국가 중에서 대한민국이 가장 인종차별이 심한 국가로 꼽혔다는 것이다. 당장 대중교통을 이용해보면 우리의 인종차별 지수를 대번에 실감할 수 있다. 백인 곁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잘 앉는 사람들이 동남아 국가의 사람들이나 흑인들 곁에는 앉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흑인과 동남아인 양 옆으로 자리가 뻔히 있는데도 서서 가는 사람들이 여러 명 있는 풍경을 심심치 않게 목도하게 된다. 


유색 인종(이 표현을 우리가 쓰는 것도 사실 굉장히 우습고 어색한 일이다.)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거부감은 우선, 우리 스스로를 미국의 중상류층 백인과 동일시하고 싶어했던 오랜 욕망이 낳은 감정일 것이다. 미국(정확하게는 미국에서 잘나가는 백인들)에 대한 맹목적 동경이 지나친 나머지 우리는 어느새 우리 스스로를 백인급의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조금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게 주요한 요인이라고 한다면 메이지 유신 시절부터 백인과 서양의 선진대국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품었던 일본인은 어째서 우리보다 인종차별 의식이 덜할까. 외려 일본인들 중에는 흑인처럼 되고 싶어서 일부러 화장을 검게 하고 다니는 젊은이들이 흔하게 널려 있다. 태평양 전쟁 탓에 동남아시아인들과의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겠지만 우리들처럼 기피하고 천한 사람처럼 여기는 분위기는 아니다. 중국인들이야 워낙에 오래전부터 중화사상에 정신적 뿌리를 두고 있어, 어느 민족을 만나던지 중국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지만 그도 나름의 공평함이 있다. 중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동등한 나라로 여기는 시각이 있는 것이다. 즉, 중국만 중심에 선다면야 다른 나라의 서열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 워낙 대국이고 여러 소수민족과 섞여져 살아온 탓인지 타국인의 피부색이나, 민족 같은 것을 따로 구별지어 사고하는 경향성은 줄어든 것 같다.   


그렇다면 백인과의 강렬한 동일시 외에도 우리에게는 무언가 중국, 일본과는 다른 특성이 가미되었기 때문에 인종차별의식이 은연 중에 배양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 변별되는 특성이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게 하는 교육문화에 있다고 본다. 내 경우만 하더라도 학창시절 엄격한 복장과 두발 단속을 겪으며 자라났다. 교복의 재질은 물론, 교복 단추의 색깔이나 모양까지 매일매일 '선도부'에 의해 감시 당하며 아주 조금이라도 다른 점이 발견될 경우 이유 불문 '엎드려 뻗혀' 형벌을 당했었다. 두발은 더 심했다. 기준이 되는 2센티미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즉각적으로 머리 한 쪽에 고속도로가 나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이게 무슨 조선시대나 2차 세계대전 시대도 아니고, 민주화된 국가에서 일어난 일이었던가 싶다. 그랬다. 정치는 민주화의 봄을 맞았지만, 교육은 여전히 군사독재시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내가 자란 1990년대였다. 


그러나 슬픈 것은 '교육의 봄'은 아직도 요원해보인다는 것이다. 아주 최근에 들어서야 학생인권조례 등이 자치적으로 몇몇 시도에서 제정되면서 두발, 복장단속, 체벌 등에 있어서 비인권적인 행위를 못하도록 권고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3~4개 지역에 그치고, 각 학교별 현장에서는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지 잘 알 지도 못한다. 


따로 연구할 필요도 없이 이런 교육현장에서의 폐습은 일제에 의한 식민교육의 잔재다. 일제는 황국신민과 조금이라도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황국신민과 다른 것은 곧 틀린 것이었다. 해방 이후 독재정권은 일제의 통제형 교육을 거의 그대로 모방하여 유지했다. 그 편이 통치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정한 표준형에서 벗어나면 빨갱이가 되는 식으로 그 용어만 바뀌었을 뿐이다. 정권이 수차례 바뀌는 동안에도 어째서인지 교육만은 별로 바뀌지 않고 이어져 내려온 탓에, 몇몇 교사들은 마치 이 폐습이 우리의 '전통'인 것처럼 착각하게 됐다. 일부 보수 교육학자 층에서는 황국식민교육과 전통 유교의 교육방식을 의도적으로 뒤섞어버리면서 더욱 뭐가뭔지 알 수 없게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허나 조선의 유학은 오히려 다수의 류파와 학풍이 공존하며 서로 상호 토론하는 속에서 발전되어 왔다. 즉, 서로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보지 않고 '다른 견해'로 인정해온 것이다. (물론, 조선 후기로 갈 수록 메인 스트림에서 이 공존의 기풍이 점차 사라져가기는 하지만) 다름을 '오답'으로 보지 않고 '견해'로 인정해야지만 토론이 성립된다. 토론이 이루어져야지만 지금보다 보다 더 나은 안이 생겨난다. 그리고 합의된 그 안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재반론을 하기 위해 연구하는 속에서 새로운 창의적 발상이 일어난다. 이렇게 아이디어든, 의견이든 가이드라인 없이 자유롭게 오고 가는 분위기가 있어야 한국형 스티브 잡스나 마크 저커버그(페이스북 창업자)도 생겨나는 것이다.   


이는 산업의 영역에서 뿐 아니라 정치 영역에서의 발전도 자연스럽게 불러오게 된다. 민주주의란 결국 시민 각자가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주장할 수 있는 사회인 것이다. 그리고 그 견해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함께 파티를 꾸려서, 즉 정당을 만들어 정책을 개발하고, 다시 다른 시민의 공의를 끌어내 최종적으로 집권하는 것을 통해 자신들이 생각했던 '견해'를 사회 속에서 실현해볼 수 있는 사회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싹이 되는 교육에서부터 미리 제도와 일부 교사들에 의해 '다른 것은 옳지 않은 것'이라는 관념이 아이들에게 주입되면 창조경제고 민주주의 정치고 실현될 턱이 없다. '다른 것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가르치는 사회는 자연히 '국가주의 사회'로 점차 변해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자라난 아이들은 '강력한 통제력'에 의한 리더십을 선호하게 되고, 이는 결국 '준 독재'의 상황을 다시 낳게 되어 있다. 피를 흘려가며 민주주의를 이 땅에 쟁취했던 어른들이 성공의 단꿈에 젖어 있는 사이, 교육은 다시 한 번 '반민주주의'의 싹을 틔우고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어렵게 쟁취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첩경은 교육이다. 그리고 그 교육의 핵심은 국영수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다르다는 것의 기쁨'을 교육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대화를 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타인에게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음악, 다양한 문학작품, 다양한 영화 등을 즐길 수 있다. 우리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정권을 교체해가며 살 수 있다. 우리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을 것 같은 속에서도 새로움을 만들어낼 수 있다. 꽃이 모두 한 가지 색이라면 우리가 꽃을 아름답다고 했을까. 어둠은 세상을 모두 하나의 색으로 만들고, 빛은 저마다의 색이 드러나도록 만든다. 그저 자연이 하는 대로 따르기만 해도 우리는 좀 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2015.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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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체로키족(Cherokee , ― 族)


테네시 동부지역과 캐롤라이나 서부지역에서 살았다. 원래 오대호 주변에 살았으나 델라웨어족과 이로쿼이족에게 패한 후 남쪽으로 이주했다. 1650년에는 약 2만 2,500명의 인구가 애팔래치아 산맥의 10만㎢에 이르는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체로키족의 생활과 문화는 대체로 크리크족 을 포함한 남동부 인디언과 비슷했다(→ 색인 : 크리크족). 체로키 부족연합은 붉은(전쟁)도시와 흰(평화)도시의 연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붉은도시 추장들은 최고 전쟁추장에게 종속되었던 반면, 흰도시 관리들은 최고 평화추장의 지배를 받았다. 흰도시에서는 범죄자에게 은신처를 마련해주었으며, 붉은도시에서는 전쟁의식을 거행했다.


16세기 중반 유럽인들과 접촉할 무렵, 체로키족은 칼·도끼·끌을 비롯해 여러 가지 다양한 석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들은 바구니를 짜고 도기를 만들었으며 옥수수·콩·호박을 재배하고 사슴·곰·순록으로부터 고기와 옷을 얻었다. 나무껍질로 지붕을 이은 통나무 오두막집에서 살았는데, 문이 1개밖에 없고 창문도 없었으며, 지붕에 연기 구멍이 1개 뚫려 있었다. 전형적인 체로키족 도시에는 보통 30~60채의 집과, 부족 총회가 열리고 성화(聖火)를 모셔놓은 회의소가 있었다. 버스크 또는 푸른 옥수수 축제라고 하는 중요한 종교의식을 통해 첫 수확에 감사하고 새로 불을 지피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여러 차례의 전쟁과 조약들, 미국 독립전쟁 때 잇달아 일어난 전투와 협정들로 인해 조지아 주, 테네시 주 동부, 캐롤라이나 서부지역에 살던 체로키족의 세력과 소유지가 상당히 줄어들고, 이들의 영토에 백인들이 마음대로 투기를 하거나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지역에 200개의 마을을 이루고 살던 약 2만 2,000명의 체로키족은 18세기초 이후 교역과 군사적 협력에 있어서 영국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1773년 체로키족과 크리크족 인디언의 요청에 따라 맺은 오거스타 조약에 의해 조지아에 있던 8,000만㎢ 이상의 부족 영토를 넘겨주었는데, 이는 인디언들이 백인 상인들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한 것이었다. 1775년 오버힐 체로키족은 시커모어숄스 조약에 따라 켄터키 중부 지역의 광대한 영토를 파는 데 동의했다. 트란설베이니어토지회사와 맺은 이 조약은 영국법에 위반되는 것이었지만 백인들이 이 지역을 가로채는 근거가 되었다. 식민주의적인 침략에 위협을 느낀 체로키족은 미국 독립전쟁 초기에 영국을 지지한다는 결정을 발표했다. 영국이 자제를 요청했지만 1776년 7월 드래깅 카누 추장의 지휘 아래 700명의 체로키족 전사들이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2개의 미국군 요새인 이튼 교역소와 워토가 요새를 공격했다. 그러나 두 지역에 대한 공격은 모두 실패했다. 이 습격을 시발로 변경지역 도시들에 대한 체로키족·크리크족·촉토족의 잇달은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그해 9~10월에 남부 여러 주에서 민병대와 정규군의 격렬한 반격이 일어났다. 패배를 겪은 인디언들은 디위츠코너 조약(1777. 5. 20)과 홀스턴의 롱아일랜드 조약(1777. 7. 20)에 따라 지금의 노스캐롤라이나·사우스캐롤라이나의 광대한 영토를 넘겨줌으로써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그후 2년 동안에는 변경지역에 평화가 계속되었다.


1780년 미국군과 영국군이 접전하고 있는 동안 기습공격을 개시했으나 아서 캠블 대령과 존 세비어 대령이 지휘하는 보복작전으로 체로키족은 또다시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2번째 체결된 홀스턴의 롱아일랜드 조약(1781. 7. 26)에 따라 이전의 영토 양도가 확인되었으며, 추가로 또다른 영토의 양도가 결정되었다. 1800년 이후 체로키족은 백인 문화에 상당히 동화되어갔다. 미국 정부를 모방한 정부를 세웠고, 주날루스카 추장 시절에는 앤드루 잭슨을 도와 호스슈벤드 전투 등에서 크리크족과 대항해서 싸웠다. 백인의 농사짓는 법, 직조 기술, 집 짓는 법도 받아들였다. 백인 문화에 동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크리크 전쟁 당시 미군에서 복무한 체로키족 혼혈인 세쿼이아가 1821년에 개발한 체로키어 음절표기법이다. 그가 개발한 음절표기법은 각 상징들을 하나의 음절로 나타내는 표기 체계로서 크게 성공을 거두어 거의 모든 부족이 짧은 기간 안에 글을 익히게 되었다. 또 성문헌법이 채택되었으며 성서 번역을 비롯해 종교문학이 발달했다. 1828년 2월 최초의 인디언 신문 〈체로키 피닉스 Cherokee Phoenix〉가 발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체로키족이 백인 문화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백인 개척자들의 토지에 대한 욕심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조지아 주의 체로키족 영토에서 금이 발견되자 인디언들을 이주시키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1835년 12월 극소수의 체로키족이 서명한 뉴이코타 조약에 따르면 미시시피 강 동쪽 영토 전체를 500만 달러에 미국 정부에게 양도하게 되어 있었다. 대다수의 체로키족은 이 조약을 거부하여 미국 연방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은 조지아 주에는 체로키족에 대한 사법권이 없기 때문에 체로키족 영토에 대한 백인들의 권리도 없다고 판시함으로써 체로키족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조지아 주 관리들은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했으며, 앤드루 잭슨 대통령은 판결의 집행을 거부했다. 마침내 1830년 인디언 이주법에 따라 체로키족은 윈필드 스콧 장군이 지휘하는 7,000명의 군인들에 의해 영토에서 쫓겨났다. 약 1만 5,000명의 체로키족이 수용소에 모여 있는 동안 백인 주민들이 체로키족의 집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그후 체로키족은 약 1,000명씩 무리지어 걸어서 서부로 이주해야 했다. 이 강제 이주와 행군은 1838년부터 1939년의 가을에서 겨울 사이에 이루어졌다(→ 색인 : 눈물의 이주). 마침내 본대(本隊)가 지금의 오클라호마 동북부지역의 새로운 거주지에 도착하자, 이미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과 새로운 다툼이 일기 시작했다. 뉴이코타 조약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체로키족에 대한 앙갚음이 이루어졌고, 다툼과 살인으로 부족이 분열되었다.


오클라호마에서 체로키족은 1830년대 미국 정부의 정책에 따라 동남부지역에서 강제이주된 크리크족·치카소족·촉토족·세미놀족과 합류했다. 75년 동안 각 종족은 땅을 분배받아 살면서 미국 주정부를 모방한 준자치정부를 세웠다. 1907년 오클라호마 주 수립을 위한 준비로 이들 영토 가운데 일부가 인디언 개인에게 넘겨지거나 연방정부에 위탁되었으며, 해방된 노예들에게 분배되기도 했다. 1906년 여러 종족의 정부들은 사실상 해체되었으나 제한된 형태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일부 인디언들은 보호구역이라는 부족 소유지에서 산다. 현재 오클라호마 동부지역에 사는 체로키족의 후손은 약 4만 7,000명이며, 그중 순수 혈통은 약 1만 5,000명이다. 1838년 이주 시기에 산악지대로 도망갔던 수백 명의 체로키족은 20세기 이후 노스캐롤라이나 서부지역에 살고 있는 3,000명의 체로키족의 핵심이 되었다.


출처 =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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