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산문/論

여성 - 신여성이 있던 자리(2005. 봄)

멀고느린구름 2015. 4. 14. 16:10

신여성이 있던 자리

* 10년 전에 썼던 글입니다. 요즘 한창 뜨거운 페미니즘 논의에 참고가 될까하여 올려봅니다 :  )



1. 신여성이란 무엇인가



1)근대와 신여성


서구 근대화의 물결에 떠밀려 개화기를 맞았던 조선은 근대의 신분제 붕괴의 사상적 기반이었던 자유론과 평등론의 논리에 바탕을 둔 양성평등 사상의 영향을 받게 된다. 대표적인 양성평등 사상인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평등 사상은 개인이 그들의 자율성을 행사하고 그들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도록 하는 사회가 곧 정의사회라고 말한다. 이에 따라 여성도 한 개인으로서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고, 동등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밀의 이와 같은 자유주의 페미니즘 사상은 조선 개화기의 여성론과 상당히 닮아 있다. 그 첫째로 여성의 동등한 교육을 강조하며, 둘째로 여성의 자립을 권장한다. 


그러나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이러한 생각은 지나치게 세계를 낙관적으로 보고, 한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제도와 역사의 그물망을 간과한 측면이 있다. 실제로 개화기의 여성교육은 그 화려한 미사여구와는 달리 현모양처, 혹은 현처양모를 배양하는 일에 머물고 있으며1), 여성이 애써 새로운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당시는 그러한 여성이 사회로 진출해 남성과 동등하게 활동할 수 있을만한 조건이 성숙되어 있지 않았다. 


이처럼 근대는 1920년대의 신여성들의 마음에 커다란 낭만적 이상으로 다가왔지만, 당시 조선사회의 현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았다. 



2) 신여성 출현!


조선에서 신여성이라는 새로운 여성의 무리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이다. 이때 등장한 제 1세대 신여성 김명순, 윤심덕, 나혜석, 김일엽 등은 모두 1910년경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세대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들은 1910년대의 유학생활 동안 당시 일본에 출현했던 히라스카 라이초우 등의 신여성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스웨덴의 작가 엘렌 케이나, 러시아의 콜론타이 등의 양성평등 연애론에서도 깊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1910년대의 유학생활을 마친 이들은 대략 1920년대부터 ‘신여성’ 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활발한 활동을 보인다. 이들은 모든 거대담론을 뛰어넘어 개인적인 사랑의 극대화를 지향하는 자유연애론을 뿌리정신으로 삼아, 당시 조선의 낡은 인습과 제도에 도전한다. 그들은 최초의 여기자가 되거나2), 예술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3), 최초로 여성들만의 잡지를 발간4)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노력은 10년 정도를 끝으로 비극적인 결실을 맺고 막을 내리고 만다. 



3) 신여성의 퇴장


193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일본은 본격적인 전쟁준비를 시작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동양주의라는 사상이 유행병처럼 조선과 일본을 휩쓴다. 동양주의란 서양에 반대되는 동양만의 고유한 전통, 사상을 지키고, 모든 동양이 일치단결하여 서양 제국주의를 무찌르자는 것이다. 허나 일본이 내세웠던 동양주의는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자발적 반성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제국주의적 야욕을 위해 서양의 오리엔탈리즘 개념을 차용한 것에 불과 했다. 서구가 바라보는 동양은 신비하고 여성적인 것이었다. 

 

1930년대 후반 이러한 동양주의의 기치 아래 신여성 및 모던 걸은 서구의 앞잡이로 비판받고, 근대화를 방해하는 골치 덩어리 정도로 취급되었던 구여성에 대한 예찬이 시작된다. 이와 동시에 신여성이라는 개념은 점차 쓰이지 않게 되고, 그 자리를 현대여성이라는 말이 차지하게 된다. 이 현대여성은 신여성과 구여성을 아우르는, 아니 좀 더 엄밀히 말해서 전시체제에 노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여성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1920년대 신여성을 찬양하고 신여성과의 자유연애를 즐겼던 많은 남성들은 1930년 후반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신여성을 배척하고, 구여성의 모성과 정조관념을 예찬하기 시작한다. 많은 남성들에게 신여성은 어쩌면 ‘합법적인 바람을 피울 수 있는 대상’ 쯤으로 치부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듯 시대적인 상황의 변화와 남성들의 태도변화에 따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신여성은 날개를 채 펴보지도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그리고 충격적으로 사라져가고 만다. 


 

2. 조선의 신여성과, 일본의 신여성 그리고 영국의 신여성



조선의 신여성과 일본의 신여성, 그리고 영국의 신여성은 모두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우선 그 기원을 따지자면 출발선에는 영국의 신여성들이 있다.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의 양대 혁명을 통해 여유로운 경제상황과 인권의식의 고취라는 두 마리 토끼를 얻은 중산층 여성계급들은 19세기 후반부터 ‘여성에게도 참정권을!’ 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자유주의페미니즘의 태동을 알린다. 이러한 참정권을 요구하며, 남성과 동등한 삶을 주장하는 여성들을 지칭하던 ‘New Woman’이라는 일본에 전파되며 ‘신부인’이라는 말로 그리고 다시 ‘신여성’이라는 말로 변화하게 된다. 


일본의 정부는 초기에 ‘신부인’ 의 등장을 환영하다가 이내 국수주의와 군국주의, 그리고 동양주의라는 기치를 내걸고 세계정복의 야욕을 품으면서부터 다시 전근대적 여성상을 일본 여성들에게 강요한다. 1911년 <세이토:청탑>의 창간을 기점으로 마지막으로 급진적인 페미니즘을 전개했던 히라스카 라이초우 등의 신여성은 1916년 <세이토>의 페간과 함께 몰락하고 만다. 그리고 그들이 몰락한 자리에 페미니즘의 사상은 사라지고, 근대의 문물과 개인주의의 영향으로 무장한 ‘모던 걸’이 역사의 무대를 점거하게 된다. 


일본에서 1920년 한창 신여성이 실세하고, 모던 걸이 득세하고 있는 즈음 조선에는 이제 막 신여성 담론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1910년 일본에서 유학하며 힘을 기르던 그들이 드디어 대규모 컴백 무대를 가진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온 신여성 담론은 그 당시 일본에서 한창 입에 오르내리던 ‘모던 걸’ 담론과 함께 들어왔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신여성과 모던 걸의 차이가 명확하게 구별되지 못했고, 페미니즘적 의식을 지녔던 일단의 신여성들도 그저 서구와 일본으로 대표되는 근대의 유행을 쫓는 모던 걸로 폄하되기도 했다. 

   


3. 신여성들은 무엇을 꿈꾸었는가

- 신여성들이 꿈꾸었던 낭만적 사랑과 사회



1)낭만적 사랑


어렸을 적에 누구나 한 번쯤 꿈꾸어 보았을 낭만적인 사랑. 로미오와 쥴리엣처럼 처음 만나날 정열적인 키스를 하고 창문 아래서 세레나데를 부르면, 뜨겁게 불타오르는 그러한 운명적인 경험. 재미난 사실은 그러한 우리의 낭만적 사랑에 대한 환상이 처음 우리나라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80여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낭만적 사랑, 그 환상의 창을 처음 연 것이 바로 1920년대의 신여성들이었다. 1920년대의 신여성과 자유주의 성향의 남성들이 소개하기 시작한 자유연애론은 수많은 담론을 양산하며 그 시대의 최고 화제로 거리를 떠돌았다. 그 시대에 나타났던 자유연애에 대한 담론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양상을 띤다. 



ㄱ. 급진주의- 연애지상주의5)


1920년대에 등장했던 제1세대 신여성의 대부분이 자유연애를 자신의 근대적 사고의 기초로 삼았다. 김일엽의 신정조론, 나혜석의 정조 취미론, 김명순의 ‘애정 없는 부부생활은 매음’ 이라는 비판에서 당시의 급진적 자유연애론의 전형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진정한 연애를 통해서 자유를 얻고, 궁극적인 행복을 찾으려 하였으나 불과 10년 남짓한 시간 만에 좌절되고 말았다. 윤심덕의 경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는 사회를 한탄하며 자신의 연인 김우진과 함께 동반자살이라는 방법을 택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동반자살은 한 때 사랑의 최고선으로 추앙받고, 유행하기까지 했다.6)


급진주의 계열의 신여성들은 자유연애를 통해 마치 사랑이 처음 조선에 발생한 것처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마치 조선의 과거에는 아무런 남녀간의 사랑과 정이 없었던 것처럼, 억압과 계약만이 있었던 것처럼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것이 그들의 한계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은 서구의 근대가 제공하는 다양한 사조들에 지나치게 관용적이었다. 



ㄴ. 자유주의- 연애도구주의

   

1930년대에 주로 남성들에 의해 시작된 성담론. 박영희, 박태원, 채만식 등으로 대변되는 이들은 연애의 정신적, 생물학적, 사회적 측면 등 다양한 면을 고찰하였으나, 궁극적으로는 연애가 가족의 형성, 나아가 공공의 이념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당시 조선에서 글 꽤나 쓴다는 이들이 주장했던 이 자유주의 연애론은 좋게 말해 자유주의지, 사실상 신여성과 적당히 바람을 피며 놀고는 싶고, 하지만 또 한 편으로 너무 신여성을 자유롭게 풀어놓으면 장래에 자기에 위협이 되니까 적당히 풀고 적당히 억압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 아닐까.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되, 이혼은 절대 불가하고, 여성은 모두 현모양처가 되야 한다는 생각은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 남성들이 전근대에서는 탈피했을지 몰라도, 가부장제로부터는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ㄷ. 사회주의- 연애무용주의


사회주의 계열의 신여성들은 계급이 있는 한, 진정한 의미의 평등한 연애가 성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들은 연애담론 자체보다 먼저 계급의 타파를 주장했다. 페미니즘 활동을 전개했던 여성의 집단들 중 유일하게 친일행적이 없는 집단이 바로 이 사회주의 집단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정치적 특수성 때문인지 이들에 대한 자료가 매운 빈약한 탓에, 거의 연구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듯 하다. 



2) 낭만적 사회


서구와 일본의 근대문물에 대한 강렬한 동경. 서구적 옷차림, 서구적 머리모양, 서구적 걸음걸이 등 물질적인 면과 서구의 종교, 서구의 사상 등 정신적인 면까지 당시의 신여성들은 서구와 일본으로 대표되는 '근대'의 환상에 강렬하게 사로잡혀 있었다. 그에 따라 서구의 발전된 모습과 낙후된 조국의 모습 사이의 크나큰 괴리로 인해 번민하는 모습을 보인다. 


신여성들은 양성이 서로 평등한 가정생활, 그리고 자신의 일을 갖고 남성과 동등하게 대접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 분위기, 더불어 여성의 자립을 꿈꾸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여성의 교육이었지만, 정작 여성에게 행해지는 교육은 굳이 학교를 가지 않아도 예전에는 가정에서 다 배울 수 있었던 가사노동 교육이었다. 신여성들이 꿈꾸었던 사회는 분명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사회였다. 양성평등,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 여성의 자립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비판을 가하기 힘들 것이다. 그저 1920~30년대의 짧았던 세월을 원망할 뿐.  


단 아쉬운 것은 애석하게도 이들 신여성들은 서구를 막연한 근대의 총아의 이미지로 이상화할 뿐, 서구와 일본이 가진 제국주의적 근대에 대한 비판의 고삐는 놓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서구와 근대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급기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길로 빠지고 말았다. 몇 년간의 서구생활을 통해 서구의 문화를 접하고, 급기야 스스로 서양인의 모습으로 자화상을 그렸던 나혜석, 일본을 통해서 서양을 느끼고 이탈리아 유학을 평생 갈망했던 윤심덕 등을 통해 신여성들이 가지고 있던 낭만적 사회, 낭만적 근대의 개념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서구에 대한 낭만적 인식은 사라지지 않고, 다음 세대인 전혜린에게로 그대로 이어진다. 



4. 끝나지 않은 신여성의 역사


신여성. 새로운 여성의 역사는 과연 1930년대 후반 신여성이 현대여성으로 대체되면서 모두 마감되어 버린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의 한국사회, 지금의 페미니스트 여성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신여성이라는 용어는 사라졌지만, 신여성의 혼 그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사라지지 않은 신여성의 혼을 신여성의 존재가 희미해져갈 무렵 태어난 전혜린에게서 다시 발견한다. 


질곡 많았던 어머니 시대의 싸움과 슬픔, 그리고 비극의 역사 뒤에 태어난 전혜린은 어머니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짙은 페시미즘의 그림자를 타고 났다. 그녀는 평범하지 않으려 발버둥쳤지만 결국 사회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던 어머니 시대의 신여성의 한을 이어받은 듯 하다. 전혜린은 끊임없이 평범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어 했다. 천제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온갖 콤플렉스에 시달려야만 했던 전혜린의 모습은 1920년대를 살았던 신여성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지 않은가.  


양성평등을 외치는 페미니스트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여성이라는 껍질을 벗어버리고 싶어하고, 그러면서 또 한 편으로는 여성으로서 육아의 기쁨을 느꼈던 전혜린의 모순은 이땅을 사는 모든 선각자 여성의 모순이요 고뇌가 아니었을까 싶다. 전혜린 역시 그 고뇌를 끝내 해결하지 못한 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얼마나 많은 여성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가. 신여성이 살았던 시대와 전혜린이 살았던 시대, 그리고 지금 여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우리는 과연 과거보다 진보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앞의 생을 산 이 새로운 여성들에게 감사해야할 것이다. 만약 우리의 사회가 신여성의 시대보다 그닥 진보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또 천재적인 신여성의 출현을 기다리고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일까. 


꼭 사회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어느 지점으로부터 일정 수준 진보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미래를 꿈꾸고 미래를 기다리며, 지금 해야 할 일까지 미래에 미루어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미래의 어느 순간 나타나 우리를 구원해줄 또 다른 신여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미래를 살지 말고 지금 여기를 살아야 한다. 신여성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지금 여기에서 신여성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신여성과 더불어 신남성도 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이올린은 활이 없으면 바이올린의 아름다운 소리를 그대로 낼 수 없듯이. 사람도 타인이 없으면 자신의 아름다운 소리를 온전히 낼 수 없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조금씩 신여성, 신남성이 되어 신여성의 역사를 잇고, 나아가 이분법적 성을 넘어 새로운 성을 지어 가야 할 것이다. 

 

2005. 봄. 멀고느린구름.

 



참고도서

<신여성들은 무엇을 꿈꾸었는가> 최혜실. 생각의 나무

<우리나라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2> 이배용 외. 청년사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 김경일. 푸른역사

<여성을 넘어 아낙의 너울을 벗고> 최은희. 문인재

<낭만적 사랑과 사회>재크린 살스비. 박찬길 역. 민음사

<전혜린 이야기>이덕희. 예하


-----------------------


1) 여자는 嫁(가)하여 夫(부)를 翼(익)하고 家(가)를 理(리)하며, 자녀를 부육하는 책임을 負(부)하여 일가의 행복을 증진하고 이를 推(추)하여 국운을 椑補(비보)함도 큰 것이니 국가가 어지 여자 교육을 중요히 여기지 아니하리오. -1908년 4월 1일 한성고등여학교 설립시 순종비가 내린 휘지의 내용- <신여성들은 무엇을 꿈꾸었는가. 최혜실> 34P 


2) 한국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 


3) 미술의 나혜석, 음악의 윤심덕, 문학의 김명순 등. 모윤숙과 노천명 등도 비록 친일을 해서 그 빛이 바래졌으나 문학적인 성취를 이루었다. 


4) 김원주의 <신여자>. 1920년 3월 창간. 


5) 급진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진영의 각각의 연애 담론에 대하여 내 나름대로 이해를 돕기 위해 연애지상주의, 연애도구주의, 연애무용주의 등의 용어를 붙여 보았다. 


6) 얼마나 고운 죽음입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죽음입니까. 죽음의 고움. 죽음의 아름다움. 두 죽음이 있어 우리에게 아름답고 고운 인상을 줄 때 한양성의 중의, 아니 조선 천지를 헤매이는 청춘남녀는 모두 행복스럽게 뵙니다. 근심이 뭐냐. 괴롬이 뭐냐. 곱게 아름답게 언제든지 떼어버릴 수가 있지 않은가. (우상규 1933:85)<신여성은 무엇을 꿈꾸었을까. 최혜실. 152p>




Comments
최근에 올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