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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교육 


4. 사람은 누구나 예술가이고 이야기꾼이다

- 멀고느린구름 



"미겔, 네가 화가라고 상상해보렴. 너는 네가 가진 재능으로 네가 알고 있는 것을 표현하려고 하겠지? 그림은 네가 깨달은 것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네가 깨달은 것을 되새겨줄 수 있을 정도로 네 인식에 근접한 것이겠지. 


자, 운이 좋아서 네가 파블로 피카소의 친구가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피카소가 너를 몹시 좋아해서 어느 날 네 초상화를 그려주겠다고 했다면, 넌 피카소를 위해 포즈를 취하겠지. 그리고 며칠이 지나 피카소가 마침내 네 초상화를 보여주겠지?


그러면 넌 이렇게 말하겠지.

'이건 내가 아니잖아.'

그러면 피카소는 또 이렇게 말할 거야. 


'아니. 이게 바로 자네야. 내가 본 자네의 모습은 이런 느낌이었네.'


피카소에게는 그것이 진리란다. 그는 자신이 느낀 대로 표현했으니까. 하지만 넌 이렇게 말하겠지.


'난 이렇게 생기지 않았어.'


인간은 누구나 피카소란다. 인간은 또, 누구나 이야기꾼이야.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은 예술가란 뜻이지. 피카소가 색깔로 했던 것을 우리는 말로 할 뿐이야. 


... 중략 ...


피카소처럼 우리 인간은 스스로 인식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꾸미고 진리를 왜곡하고 있어.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그것이 진리인 거야. 물론 우리가 진리를 왜곡해서 표현했을 때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도 있겠지. 피카소의 그림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니까. 


인간은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단다. 그렇다면 왜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야 하는 거지? 그것이 그들에게는 진리가 아닌데도 말이야. 그것을 이해하고 나면 넌 더 이상 네가 믿는 것을 옹호할 필요가 없어지겠지. 내가 옳고 다른 사람을 틀리게 만드는 것이 중요한 일은 아니란다." 


- 돈 미겔 루이스 <내가 말을 배우기 전 세상은 아름다웠다> 31~34쪽 중. 



위에 인용한 글은 멕시코의 원주민 톨텍 부족의 후예인 돈 미겔 루이스가 부족의 주술사였던 그의 할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톨텍(Toltek)'은 우리말로 옮기면 '영혼의 예술가'라는 의미가 된다. 아메리카 대륙의 고대문명 중 하나인 아즈텍 - 톨텍 문명은 인간의 마음 - 욕망을 포함한 - 을 안개(미토테)라고 표현했다. 사람의 마음은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있는데, 이 안개를 걷어내고 나서야 진정한 자신과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고 여겼다. 


아이였을 때의 나는 나보다 나를 잘 안다고 자처하는 수많은 어른들의 부정적인 말을 들으며 자라났다. 나는 그저 나인 것이 좋고, 나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 없었지만 어른들은 달랐다. 어른들은 내가 목소리가 작아서 남자답지 않다고 했고, 인형을 데리고 놀아서 계집애 갔다고 했으며,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남과 어울리지 않아 사회에 부적응할 거라고 걱정했다. 머리가 나쁘니까 일찍 공장에 취직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고, 그런 말들에 이의를 제기하면 건방져서 어디다 써먹지 못할 거라고 저주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좋았다. 인형들과 정답게 노는 것이, 혼자 숲 속에 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올려다보는 것이, 조용히 음악을 듣고 있는 것이, 아득한 상상의 나라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것이 참 좋았다. 그러나 워낙 거센 부정적 여론에 직면해야 했기 때문에 점점 나 자신을 부정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해보게 되었다. 


허나 그렇게 하면 할 수록 나는 어딘가 경직되어 갔고, 세상과 사람을 멀리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우연히 류시화 시인이 번역한 인디언 관련 책들과 성현들의 이야기를 담은 성경이나 논어 같은 책들을 읽으며 그런 노력들이 다 부질 없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알게 되었고, 남이 바라는 내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 사실, 그렇게 하고자 했어도 능력이 부족해 못했을 것이다. 


아이를 기르거나, 학생을 가르칠 때 누구나 상대가 자신이 바라는 모습대로 자라주길 바라는 기대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자연스런 욕심일 것이다. 그러나 그 욕심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생각이 자리잡게 되면 상대도 나도 그르치고 만다. 왜냐하면 나와 상대는 서로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 예술가가 자신의 후학을 양성하면서 제자에게 자신과 똑같은 작품을 만들라고 한다면, 그 예술가를 훌륭한 스승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좋은 스승이라면 제자에게 자신과 다른 너만의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가르칠 것이다.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것은 자신이 만들어야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 나에게 온갖 다른 모습을 기대했던 어른들의 말은 사실 자기 자신이 되고 싶었던 모습을 나에게 투영한 것뿐이었다. 남자답고 싶은 마음,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싶은 마음, 공부를 잘 하고 싶은 마음, 그런 것들은 모두 그것을 요구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일 뿐이지 요구받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의 이야기를 강요하면 상대의 이야기가 온전히 생성되지 못하고 망가지고 만다. 


아이가 어떤 그림을 그리려고 할 때, 어른이 나서서 이건 이렇게 그려야 하고, 색은 이렇게 해야 하고 일일이 간섭하게 되면 아이는 곧 그림 그리는 일에 흥미를 잃고 만다. 그림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님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인생 역시 아이가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어른들이 아이의 인생에 대해서, 혹은 아이 자신에 대해서 그림에 개입하듯 개입하려고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려고 하는가? 아이에게 어떤 사람이 되라고 충고하기 이전에, 스스로에게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이 아닐까. 사회적인 시선이나, 선입견, 기대치 등등을 모두 내려놓고 자신이 아이였을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 질문을 던져보자. 


나는 어떤 사람이 되려고 했고, 정말로는 어떤 인생을 살고 싶었던 것인가. 그리고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는가. 


만약, 여러분이 이 질문에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있다면 아마도 더이상 아이에게 무엇이 되라고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답을 내릴 수 없다면 아이에게 말하기 이전에 먼저 자신의 답을 찾는 것이 과제일 것이다. 아이에게는 아이 자신만의 답이 또 있을 것이다. 어른의 역할은 미겔의 할아버지처럼 아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지어갈 수 있도록 최대한 잡음을 제거해주는 일이지, 자꾸만 온갖 선입견을 심어주고 외압을 행사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왜 이 세상에 온 것일까? 행복의 조건은 무엇일까?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미 모두 그 정답을 알고 있다. 온갖 다큐멘터리와 책, 영화 등등을 통해 정답이 홍보되고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우리는 애써 그 답을 피해서 살아가려고 한다. 그래도 현실이... 그래도 이 사회가... 라고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톨텍 인디언들은 자신의 마음의 겉에서 떠도는 그런 메시지들을 일컬어 '안개'라고 표현한 것이다. 


내가 말을 배우기 전 세상은 아름다웠다. 우리 모두 아이였을 때는 반짝이는 세상 속에 살았다.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왜 그랬을까. 내가 그저 나이면 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아이의 안개를 걷어주는 어른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안개를 더 짙게 만드는 어른은 되지 말아야 할 텐데 그것이 참 걱정이다. 



2014.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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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톨텍(Toltec)은 마야족이 멸망한 8세기경부터 13세기까지는 멕시코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톨텍 족 이후에는 아즈텍족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신고전기 (900∼1521년) 테오티와칸이 몰락하자, 북쪽에 살던 톨텍 족이 멕시코에 왕조를 세웠다. 톨텍은 단일부족이 아니라 반수렵민인 톨텍족과 치치멕족이 중심이 된 부족 집단이었는데, 어느 시점부터는 하나의 부족으로 통합되었던 것 같다이 침입하여 마야족을 정복했다. 멕시코 톨텍 인디언은 초자연적인 세계를 탐구하고 고대로부터 이어져오는 진리를 실천하는 과학자이자 예술가였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케찰코아틀에게 더큰 치욕을 안겨 주기 위해 톨텍 사회 전체를 파괴시킬 궁리를 했다. 

그는 전염병을 퍼뜨리고, 화산을 폭발시키는 등 갖가지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아즈텍 왕국이 건설되었다. 1200년경 톨텍 제국이 몰락한 이후 나라는 갈등과 혼란에 빠져들었다. 치와와는 9세기에 멕시코 인디언의 톨텍 족이 기르고 있던 테치치라는 소형의 개가 근원이 되었다고 하는 세계에서 제일 작은 개이다. 톨텍족을 정복한 아즈텍족의 유적에서도 테치치 유물이 발굴되고 있기에 이 견종은 수백년에 걸쳐 혈통이 보존되고 있다.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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